김효순 대기자
일본의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NHK)는 강제병합 100년 기획으로 ‘일본과 한반도’라는 5회 시리즈를 방영했다. ‘한-일 관계는 이렇게 구축됐다’는 마지막 회는 지난 8월 초 방영됐는데 뒤틀린 한-일 관계의 원점을 생각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진 내용이긴 하지만 프로그램을 직접 보지 못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한-일 기본조약 체결과정의 막후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의 비중이다. 36년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면죄부를 일본에 주기 위한 금액의 규모가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결정됐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1962년 11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가 유·무상 5억달러에 민간경협 등으로 1억달러 정도를 얹는다는 극비합의를 했다.
5·16 쿠데타 세력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일본에 요청한 금액은 7억달러였다. 이에 대한 일본의 제시액이 7000만달러에 불과해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케네디 행정부의 한국 전담팀은 미국이 ‘촉매’ 구실을 해야 한다며 3억8500만달러를 적정선으로 상정했다. 7억달러와 7000만달러를 합쳐 둘로 나눈 액수다. 오히라와 김종필은 액수 담판에 앞서 따로따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찾아가 협의를 했다. 러스크는 이 문제가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으로서도 가장 중요하다며 어떻게든 합의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중남미 정세에 쫓겨 한-일 간의 분쟁에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김-오히라 메모 교환은 쿠바 미사일 위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이 역설적으로 한-일 협정의 졸속 체결을 재촉한 셈이다.
둘째, 쿠데타 지도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협상 타결을 위해 매달린 일본 쪽 인맥의 극우적 성격이다. 박정희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내각에서 상공상을 지냈고 전후 에이급 전범으로 구속된 바 있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의 어느 위정자보다도 한국에 대해 깊은 이해와 호의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각별한 협력을 요청했다. 박정희가 실무협상진에게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라고 지시한 인물 중에 고다마 요시오도 있다. 고다마는 중일전쟁 기간 중 상하이에서 특수공작을 담당했고 전후 일본 보수정당의 돈줄 구실을 한 우익의 거물이자 정치브로커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61년 11월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미국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첫 대면을 했다. 이케다가 주최한 만찬에 박정희의 요청으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교장을 지낸 나구모 신이치로가 참석했다. 박정희가 “교장 선생님 덕택에 일본 육사를 나왔고 이제 한국을 대표해 일본 총리를 만나게 됐다”며 술을 따르자 일본 요인들이 박수를 쳤다. 당시 만찬 풍경을 화면으로 보니 기분이 실로 묘했다.
셋째, 일본의 패전을 경계로 한 기시와 박정희의 역사인식 변화 여부다. 기시는 만주국 건설을 주도해 산업개발 5개년계획 작성, 중공업 건설, 전시통제경제 실시에 앞장섰다. 기시는 57년 총리에 취임하고 나서 동남아를 순방하며 배상 문제 마무리에 애썼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일제 때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뒷받침하는 ‘대아시아주의’와 전후 자신의 아시아 선린외교 사이에 단절은 없다고 단언했다.
기시와 박정희는 만주국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 기시는 61년 도쿄의 요정에서 박정희와 몇 차례 만나 한-일 협상에 대해 국민이 박수갈채하는 조약을 만들려면 진정한 정상화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100년 뒤 좋았다고 생각될 만큼 앞을 내다보는 자세로 임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현재의 국민감정에 영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때 박정희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오고 갔을까? 기시의 역사인식은 일관돼 있다. 박정희의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하나?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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