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영 동아방송예술대 교수
영화 <아저씨>가 장안의 화제다. 영화와 현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왜 옆집 아저씨가 나서야만 했는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은 시민을 보호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그 수장이 될 사람은 현재 이상한 발언으로 정쟁의 중심부에 서 있다. 어디 시민을 돌볼 겨를이나 있겠는가. 각종 성폭력범은 횡행하고, 시민들이 잡아다 줘봐야 그때뿐 형벌은 솜방망이다.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만일에 자기 가족이 당했다면 어떠게 했을까 자문하게 된다. 이를 갈며 범인을 찢어 죽이고(아저씨 말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먹고)도 남을 심정일 것이다. 영화 속 아저씨는 보통 시민의 울분을 대행해주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타임투킬>이나 <다이하드> 시리즈는 자기 가족의 불행이나 위험에 맞서 직접 응징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결손가정들이다. 물론 우리의 문화 환경이 가정을 아직까지 성역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결손가정의 중첩된 불행에 마음 아플 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던져준 셈이다. 악을 낳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는 사회악 일소는 요원하다. 아저씨(원빈)도 마찬가지다. 정의를 위해,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일했건만 남은 건 쓰라린 추억과 몸뚱이 하나뿐이다. 내일을 추구하지 못하고 오늘만을 연명하고 있다.
그게 어디 삶인가. 현재의 대한민국 보통 아저씨들 또한 마찬가지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국가의 부름에 병역도 마쳤고, 일하라면 일 한 죄밖에 없는 아저씨들. 스스로의 창살(전당포 창살)에 갇혀 감옥의 안팎이 도치된 줄도 모르고, 살아있는 몸뚱이를 건사할 푼돈을 마련하기 위해, 남의 아픔마저 담보(저당)잡으면서 아등바등해야 한다. 거기에 이웃집 꼬마 아이의 목숨까지 지켜야 할 임무까지 부여받았으니, 람보가 되어야만 제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영화에서는 람로완이라는 이방인이 나온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경찰은 어떠한가? 마약범들은 놓치고 정의의 칼을 빼어든 아저씨를 오히려 뒤쫓고 있다. 그들의 행색은 범죄집단과 다를 바 없으며, 좋은 나라인 아저씨 체포를 놓고 생색내기 싸움이나 벌이고 있다. 그러니 아이의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이때 옆집 아저씨라도 나서야지 어떻게 경찰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우리 옆집 아저씨가 출신을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신분이라는 점이 답답할 따름이다. 아저씨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난’(The man from nowhere) 사회악을 응징하는 저승사자일 뿐이다.
왜? 그는 구세주이면서, 해결사이면서, 주인공이면서 신분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고 신화의 탈을 써야 했는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비밀주의와 신비주의에 싸여 있다는 말이다. 차근차근,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검증받는 과정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어디서 난데없이 나타나 세상을 놀래는 영웅들(그들은 대부분 영웅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만)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정상적인 주인공으로는 이 현실을 타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가 화제에 오른다는 것은 칭찬 일색이 아니라 비판의 시각도 존재한다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많은 네티즌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구성에서 의문점이나 문제점이 노정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아쉬운 것은 우리의 아저씨가 더 죽도록 고생하지(다이하드) 않았느냐는 점이다. 악의 상징인 일당들을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제발 죽여 달라고, 관객들이 손에 땀을 쥐고 발을 동동 구를 때(타임투킬)가 없었느냐는 점이다. 그랬다면 옆집 아저씨가 진짜 삼촌처럼, 아빠처럼 느껴졌을 텐데 말이다.
남궁 영 동아방송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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