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호 소설가
한국 문학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문단에 화두가 되고 있다. 한국 문학이 쇠멸 상태라는 것을 빗댄 표현이겠지만, 오죽하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나돌까.
그중 문학의 중심 장르인 소설은 어떤가. ‘지리멸렬’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행본이나 창작집을 발간하는 출판사와 중·단편의 발표지면이랄 수 있는 문학잡지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이고, 1000여명의 소설가가 적은 고료를 받고서라도 작품 발표의 장으로 이용하는 유고료 문예지도 수를 헤아릴 정도로 줄었다. 그마저 일 년에 서너 차례 발간되는 계간지가 대부분이고, 한 회에 소설은 단편 기준으로 두세 편 게재되니 유고료 문예지에 게재 지면을 얻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극단적인 비관론이 나돌고 만부득이 소설을 절필하는 소설가가 속출하는 것인지 모른다. 물론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건 전적으로 작가들의 책임이다. 좋은 작품을 써서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독서의 저변을 넓히지 못한 책임 말이다. 그렇다고 작가들에게만 소설의 쇠멸 책임을 따지고 한정시키기엔 소설이 갖는 문화적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외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문제가 없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은 책상에 앉아 있으면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다. 작품 한 편을 쓰기 위해선 자료 수집이 필수이고 작품의 구체성을 높이기 위해서 배경이 되는 현장 방문도 해야 한다. 이렇듯 창작에 들어가는 시간과 경비가 만만치 않은데도 소설 창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입은 쥐꼬리만하니 이 땅의 소설가로 사는 한 가난은 감수해야 할 덕목쯤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난은 소설 창작에서 제한적이고 장애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의 구상이나 자료를 얻고자 국내외를 수시로 나다니는 외국의 작가들과 달리 국내 작가들은 호구에 급급한 나머지 책상머리 창작에 치우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국내 작품이 내용이나 질에서 다른 나라 작품에 못미친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실태조사(2009년)를 보면 문화예술인들의 37.4%가 활동에 따른 수입이 없는 걸로 나와 있다. 그 수입 없는 문화예술인 중에서도 문학인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소설로 생계를 꾸리는 소설가는 손에 꼽을 정도이니 경제 규모가 세계 13위인 이 나라에서 소설가는 빈민층이나 다름없다.
문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할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의 원천이고 전승·발전시켜야 할 민족의 유산이다. 문화는 정치·경제와 더불어 사회의 3대 축을 이루고 있다. 그 문화의 근간이 문학인바, 그 문학을 도외시하고는 문화를 논할 수 없으며, 선진국 진입도 문학의 창달 없이는 한낱 희망사항에 그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정책 기조는 ‘선택과 집중’ ‘사후지원’ ‘간접지원’ ‘생활 속의 예술’ 등이다. 예산 규모는 정부 지원 1000여억원과 기금 및 외부 지원 등을 합쳐 대략 연간 2천 수백억원이다. 예산이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분야는 공연·전시예술과 영화와 영상 관련 콘텐츠 개발 등이고, 문학에 할당되는 몫은 4% 남짓한 100여억원 정도이다. 문학 예산은 전체 예산액과 마찬가지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어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출판사 지원과 각종 행사비 지원, 단체 지원 등 간접지원을 빼고 나면 문학인 개인에게 지원되는 금액은 미미한 수준이다.
정부는 문학의 쇠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문학과 관련된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 또한 간접지원을 최소화하고 문학인에 대한 직접지원인 개별 지원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꿔야 한다. 문학을 중심예술에서 기초예술로 자리매김한 이 정부의 정책이 문학을 고사시켰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강경호 소설가
정부는 문학의 쇠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문학과 관련된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 또한 간접지원을 최소화하고 문학인에 대한 직접지원인 개별 지원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꿔야 한다. 문학을 중심예술에서 기초예술로 자리매김한 이 정부의 정책이 문학을 고사시켰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강경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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