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날씨가 더없이 쾌청했던 지난 토요일, 인사동 사는 ㅇ씨는 산책 코스를 평소보다 길게 잡았다. 숙정문, 팔각정 거쳐 국민대까지 가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삼청공원에 와보니 삼청동길이 무단주차한 차들로 주차장이 돼 있었다. 공원 뒤 산길을 올라 숙정문 안내소 근처에 이르자 아직 안내소까지 100m도 더 남았는데, 안내소 통과를 기다리는 줄이 서 있었다. 한명씩도 아니고 여럿씩 무리지어 서 있는 그 인파가 모두 신분증 확인받고 표찰 받아 통과하려면 최소한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때가 오후 1시30분이고 숙정문은 3시까지만 들어갈 수 있으니, 저 줄 뒤 3분의 1부터는 들어가지도 못할 판이었다. ㅇ씨는 그럼에도 느긋하게 뒷줄에 서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전부 처음 온 건가?’ 옆사람 말을 들으니 며칠 전 텔레비전 프로 <1박2일>에 이 길이 나왔단다. ‘숙정문 개방된 게 언제인데 이제야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이렇게 몰려드나….’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울 사람들 참 갈 데가 없구나.’
ㅇ씨는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이화동 날개 벽화가 생각났다. 종로구 이화동 담벽에 날개를 그려놓은 건데, <1박2일>에서 이승기씨가 그걸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 명소가 돼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벽화를 그린 이가 새로 고쳐 그리려고 갔더니 주민이 지워달라고 했단다. 사람이 몰려 시끄럽고, 길 막히고, 가난한 동네인데 재개발될까 두렵고, 야밤중에 남자들이 팬티바람으로 사진 찍는 추태도 벌이고,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벽화를 지웠다고 했다. 누리꾼과 몇몇 언론은 추태 부린 이들에게 비난을 쏟았다.
ㅇ씨는 방향을 바꿔 와룡공원, 성균관대학교를 거쳐 낙산공원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사람 사는 곳이 볼거리가 되고 명소가 되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일일 거라고. 그런데 벽화는 지움으로써 해결했다 치고 다른 경우엔 어쩔까. ㅇ씨는 추석 연휴 때 ‘북한산 둘레길’ 표지판을 따라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레길’이 평창동 주택가를 관통했는데, 거길 지나는 등산객 인파가 길을 메우고 있었다. ‘옛날부터 있던 길인데, 거기에 팻말 하나 붙이니까 또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구나….’ 부자 동네라 담도 높고 재개발을 두려워할 세입자도 적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민원이 나오겠다 싶었다.
평창동뿐일까.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 계곡 가는 골목길은, 텔레비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 나온 카페 때문에 2~3년 전부터 휴일마다 붐빈다. 거기 더해 종로구청에서 부암동 ‘골목관광’ 코스를 지정해 그 지도를 주택가 입구에 걸어 놓았다. 이 골목엔 차를 몰고 오는 사람이 많아 휴일엔 가는 차 오는 차가 서로 막아서고, 사람들은 그 사이로 겨우 빠져나가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집을 고쳐 카페로 바꾼 곳이 하나둘 늘면서 주택가 풍경이 카페 길처럼 바뀌어가고 있다.
ㅇ씨가 낙산공원 정상에서 서울성곽 외벽을 따라 동소문 쪽으로 걸으니 길이 끊겼다. 오른쪽으로 난 주택가 골목길이 한성대입구역 쪽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부촌이 아니었다. 길이 매우 좁고 담도 낮았고 집들이 정원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나는 사람의 말소리, 발자국 소리까지 집 안에서 다 들릴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골목 양쪽 벽이 “제발 조용히 해 주세요”라는 글귀로 도배가 돼 있었다. ‘여기야말로 인파의 홍역을 알고 있구나. 역시 가난한 곳이….’
북한산과 서울성곽 일대는 이제 휴일이면 주택가까지 초만원이다. 텔레비전에 나왔다, 스타가 사진 찍었다, 관청에서 여행길로 지정했다 등등의 이슈만으로도 인파가 넘친다. 동네마다 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주택가다운 모습이 남은 게 이곳뿐이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계속 몰리면 이곳도 변화가 불가피할 거다. 주택가에 사람이 몰리면서 생기는 원성과 잡음들이 변화를 늦출지 재촉할지 예측이 쉽지 않았지만 ㅇ씨로선 어떻든 변화가 더디게 진행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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