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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가을밤,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 김도형

등록 2010-10-20 20:15수정 2010-10-21 10:17

김도형 문화부문 편집장
김도형 문화부문 편집장
얼마 전 발표된 서울 소재 대학생들의 독서목록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지난 10일 권영진 의원(한나라당)이 국정감사에서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제출받은 서울시내 8개 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서강대·성균관대·숙명여대·이화여대·한양대) 도서관 대출실적 자료를 공개한 것을 보니, 이들 대학에서 가장 즐겨 읽는 책이 영국의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였다. 3개 대학에서 대출 순위 1위로 나타났다. 다른 대학에서도 이 책은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으로 수억명이 읽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내용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중·고등학생 시절에 ‘졸업’했어야 할 책이 이른바 명문대 학생의 대출 1순위에 꼽힌 현실은 씁쓸하다. 대출 순위에 오른 다른 책들도 이미 알려진 소설 등 베스트셀러 위주이고 고전이나 사상서 등 교양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연봉, 출신학교, 영어점수, 복근, 외모 등은 따져도 독서량과 독서목록은 스펙으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물신풍조는 책읽기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 지 오래다. 여기에 기존의 인터넷에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까지 급속히 확산되면서 활자매체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30개국 중 인쇄매체 접촉시간 조사에서 꼴찌를 기록했다는 최근 유엔의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내가 얼마 전 ‘트친’(트위터 친구들)에게 물어본 독서실태에서도 트위터와 독서시간의 상관관계에 동의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한달에 10~12권을 읽는데 트위터 때문에 독서시간이 줄어들어요. 그래서 시간을 정해서 딱 그 시간만 하려고 하는데 잘 안돼요.”(아이디 @yaiya5301)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지난 3월 도쿄에서 돌아온 이후 텔레비전 보기와 트위터 하기에 더 열중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산 일본어판 문고본 <우리들의 두뇌 단련법>(한국에서 <지의 정원>으로 출판)을 읽고 큰 자극을 받았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의 금권정치를 파헤친 책을 써 명성을 얻은 유명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70)는 또다른 다독가 사토 마사루(49)와의 대담을 기록한 이 책에서 6만~7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책 보관 빌딩까지 보유한 그는 지금도 매달 십수만엔어치의 책을 산다고 한다. 사토도 매달 20만엔 정도를 책을 사는 데 쓴다고 말했다.

“각자의 서재에서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한 교양서 100권씩을 선정해달라”는 이 책의 기획사 문예춘추의 요구에 따라 두 사람이 선정한 책을 보면 사상, 철학, 자연과학 등 딱딱하고 무거운 책들뿐이다. 돈이 되는 책은 한 권도 없다.

멀리 일본까지 갈 것도 없이 내 주변에도 다독가들이 있다. 날마다 서점 행차를 빼놓지 않는 지인은 1만권 가까운 책더미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전혀 무관한 책들을 읽고 사는 그를 보면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본다. 한달에 4권 정도 책을 읽는다는 한 트친(@lifree_)의 책을 읽는 이유도 비슷했다. “고민하고 있을 때 고민을 덮어두고 책을 읽다 보면 꼭 고민에 대한 답이 보이게 되더라구요.”

한국 사회가 유난히 대립과 갈등, 불신이 팽배한 것도 책 속에서 지혜를 구하는 작업을 천대하거나 소홀히 한 까닭은 아닐까? 책을 읽더라도 당장 도움이 되는 책이나 몇몇 분야의 책에 치우치다 보니 급변하는 세계 속에 인식의 폭을 확장하지 못하고 길에서 헤매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나부터 잘난 체 그만하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시간을 늘려보고 싶다. 우선 당장은 그동안 미뤄둔 838쪽의 두툼한 책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독파하기다. 적대적 경쟁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능력에 의한 새로운 경제활동 가능성을 설파했다니 새로운 자본주의의 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도형 문화부문 편집장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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