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글철학연구소 소장
본디 모습을 되찾는다며 내건 지 석 달이 채 안 된 광화문 현판이 맨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큰 금이 가서 갈라졌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판재에서 습기를 빼지 않은 게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연말까지 끝내기로 했던 일을 광복절 경축식이라는 정치적 상징 효과를 노리고 기한을 앞당겨 일을 끝냈으니, 먼저 이런 방침을 정한 사람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이 현판은 한글 현판을 한자 현판으로 바꾼다는 또다른 측면에서도 이미 2005년부터 논란이 되고 있다. 한글 단체들은 그때부터 상징성이 큰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먼저 어떤 이유에서건 있던 현판을 내리고 새로 현판을 만들어 단 것은 부자연스럽고 예외적인 사건이다. 임진왜란과 6·25를 계기로 타버린 현판을 다시 만든 것은 자연스럽다. 새 현판 제작이 처음부터 필요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원형 복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탈근대주의 사상에서 강조하듯, 원형은 시차를 두고 사후에 구성되는 개념이다. 사후에 구성되기 때문에 원형은 처음부터 실재하는 것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고종 때 임태영이 쓴 현판도 처음에는 원형이 아니었다. 1968년에 박정희가 쓴 현판도 그때는 원형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한글로 된 문화재를 거의 보지 못한 우리에게 통념의 전환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2008년 숭례문 화재 때, 불길 속에서 그 현판을 어렵사리 구해냈다. 그때 훼손된 이 현판은 이제 복원을 마쳤다. 제 모습 되찾기나 복원은 이런 경우에는 제대로 쓰인 것 같다. 그렇지만 유리 원판에 나타난 이미지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복원한 광화문 현판도 원형인가. 그렇지 않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호하다. 광화문 현판의 경우는 숭례문과 차이가 크다. 복원 전과 복원 후 사이에 문화재의 물질적 연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에서 시간과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물질적 재료의 지속성과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복원이라기보다 복제다. 기술로 무수히 복제할 수 있는 문화재란 개념을 파괴하게 된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른바 “원형 복원”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이다. 광화문의 담장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다고 그것을 허물고 원형대로 돌로 다시 쌓아야 한다는 결론을 낼 수 있을까. 과거의 잘못은 무턱대고 지워야 하는가. 지금의 평가로 유물에 함부로 손대는 것은 우리 시대의 월권이 아닌가. 다음 세대도 잘못됐다고 자꾸 손을 댄다면 문화재는 끝없는 변형과 왜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따지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온 느낌이 든다. 지금의 광화문 한글 현판도 본디 한자로 쓰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 한글로 썼기 때문에 잘못된 복원이 아니라, 문화재란 한자로 된 것이라는 통념을 깼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원형 복원이라는 문제에 대해 좀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판 글씨를 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판을 계속 달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접 끼어들어선 안 된다. 현판이라는 텍스트의 의미 이해나 평가는 어디까지나 자유롭게 하되 역사적 평가를 곧바로 문화재 원형의 변경이나 철거로 연결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지난 광복절에 40년도 넘은 한글 현판을 버리고 한자 현판을 새로 단 이명박 정부의 역사의식도 문제가 있다. 한자를 ‘진문’이라 떠받들고 중국과 다른 글자를 쓰면 오랑캐가 된다 하고 우리말을 ‘방언’이라 하던 아픈 역사는 단순히 교과서적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박물관에 갇힌 한글 현판을 본디 자리에 다시 갖다 놓는다면 문화재 보존의 논리에도 맞고 현판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 때 생기는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김영환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글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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