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호 국제부문 기자
지난달 29일 하노이에서의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회담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관계 진전을 할 수 있는 회담을 하자”고 했다. 이 대통령은 그에 앞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을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클린턴 장관은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도 동의한 것으로 돼 있다. 중국은 의외다.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는 지난 8월 말 창춘 정상회담 때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합의였기 때문이다. 더 의외인 건 북한도 서두르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중국을 찾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10월15일 우다웨이 한반도 사무 특별대표에게 “6자회담 재개 준비가 돼 있다”며 “상대측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인내성 있게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와 다른 북한의 이런 태도는 중국과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 말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처럼 한국의 때가 아니라는 얘기를 미국이 밀어주고 중국이 받아들이자 6자회담의 연내 개최는 물건너간 듯하다.
2008년 6자회담이 결렬된 이래 2년여 가까이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똑같다. 회담을 위한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회담을 위한 회담을 하자고 할 리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거듭하는 것일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과 6자회담은 모두 회담을 위한 회담이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우린 그런 정략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의연하게 원칙 있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자기과시용 발언이다. 다른 하나는 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나온 책임전가성 발언일 수 있다.
앞서 김계관 제1부상은 우다웨이 대표를 만났을 때 “9·19 공동성명을 이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9월 클린턴 국무장관은 북한이 비핵화를 진지하게 논의할 용의가 있다면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관해 분명하게 북쪽에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제1부상의 발언은 그 답이기 때문이다. 미·중, 북·미는 6자회담으로 갈 준비가 돼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발언은 역설적이지만 의연함보다는 조바심에서 나온 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제 회담을 못 열고 있는데 그건 북한 때문이다라고 말하기가 어렵게 됐다. 회담을 해보지도 않고 회담을 해봐야 소용없다고 얘기하는 건 더 설득력이 없다. 클린턴 장관은 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북핵 문제 등 주요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전략적 고위협의를 확대해나갈 것을 제의했다. 마이크 해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4일 오바마 대통령이 이번 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으로부터 북핵 문제의 해법을 듣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이미 클린턴·부시 행정부 초기 대북특사를 지낸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 등 미국 쪽 전문가들의 방북이 시작됐다. 북-미 양자접촉의 전 단계로 보인다.
이는 미국이 그에 앞서 한국으로부터 듣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다. 회담이 진전을 볼 수 있기 위해서 한국이 요구하는 건 뭐고, 한국이 하려고 하는 건 뭔가. 언제까지 회담장 밖에서 회담 결과가 보장돼야 회담에 나가겠다고 버틸 수 없다는 건 이 정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강태호 국제부문 기자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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