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우 충북대 교수·사회학
요즘은 포퓰리즘이 대세다. 아니, 정확하게는, 포퓰리즘에 대한 무비판적 비판이 대세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외교 등 거의 모든 사회적 논란에서 포퓰리즘은 단골 메뉴가 된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예컨대, 보수는 독도 문제나 우익 교과서 문제와 관련한 한국의 민족주의적 태도를 외교적 포퓰리즘, 빈곤 계층의 복지 향상 요구를 사회경제적 포퓰리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인다. 이러한 포퓰리즘 공세는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정치에 충실히 반영하려는 노력을 공격하는 데 이미 상당히 유효한 전략이 되고 있다. 포퓰리즘에 대한 진보의 반응도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진보는 재래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어묵을 사먹고 상인들에게 목도리를 걸어주는 친서민 이벤트를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가히 포퓰리즘은 오늘날 정치담론에서 동네북과도 같은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진보 보수를 막론한 이러한 포퓰리즘 비난에서 정작 위축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는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시민의 주권적 지배가 양자 모두의 핵심 준거이다. 권력의 정치적 정당성이 법의 지배에서 나온다고 믿는 자유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그것이 시민에 있다고 본다. 법의 지배가 실제로는 강자의 지배를 은폐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큰 반면,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동일성만이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의지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흔히 보통 사람들의 힘에 호소하고 그들과 엘리트 사이의 적대를 강조하는 특성을 보인다고 하지만, 시민의 의사에 반하여 자신들만의 이익을 탐하는 권력 엘리트를 무책임하고 부패한 특권 집단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민주주의 규범과 상치하는 것이 아니다. 엘리트가 시민의 의지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국민투표나 주민소환과 같은 직접 민주주의 요소들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민주주의 규범에 어긋나는 포퓰리즘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이념과 선출된 권력 엘리트에 의한 그것의 실행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에 주목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아니며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와 매우 잘 부합한다.
포퓰리즘을 진짜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위에서 열거한 민주주의와 사실상 다를 바 없는 특성들이 아니라, 그것의 권위주의 혹은 전체주의 성향과 다원주의에 대한 적대적 태도다. 포퓰리즘에서 시민은 공통의 의지와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질적 실체다. 그리고 시민의 동질성을 위협하는 모든 이질성은 정치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욕구와 견해와 가치관을 가진 개별 주체들과 집단의 이질적 집합체로서 시민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포퓰리즘에는 시민의 동질성이 시민의 의지에 대한 다양하고도 서로 경쟁하는 해석들에 의해 오직 일시적으로만 어떤 하나로 규정될 수 있다는 열린 정체성 관념, 시민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동의 정체성 관념이 부재하다. 대신 시민의 동질성에 맞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 관계를 확산시킨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이라는 말로 자신과는 다른 견해와 관념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반(反)대한민국 세력’, ‘대한민국 정체성 부정 집단’으로 규정하는 행위야말로 포퓰리즘 혹은 전체주의적 발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민주주의 이론가 클로드 르포르는 “포퓰리즘을 특징짓는 ‘하나로서의 인민’이라는 허구적 상상은 전체주의와 동일한 특징”이라고 이미 설파한 바 있다.
이처럼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와 구분시켜주는 것은 그것의 전체주의 경향이지, 인민에의 호소, 권력 엘리트 비판, 시민의 정치 참여와 직접 민주주의 강조 등이 아니다. 그러니 포퓰리즘이라는 칭호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시민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을 강요하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견해를 불용하고 죄악시하는 집단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항우 충북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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