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연평도 주민들이 앞다퉈 섬을 빠져나왔다. 심경이 참으로 처절해진다. 피난이라니. 60년이 지난 오늘에 그 참혹한 전쟁의 상흔이 다시 재연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빠져나온 구렁인데.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사건들을 두루 경험해온 우리 세대에서 이 진창은 끝난 줄 알았더니. 서로 죽고 죽이는 업의 연쇄 고리로 엮이지도 않은 젊은이들의 잇단 희생 앞에 참으로 처연한 마음이다.
억울한 죽음이 당사자 가족들에게 또다시 얼마나 깊은 골을 패게 하고 몰이성적인 극단의 감정으로 몰아갈 것인가. 통일운동에 몰두하고 있던 1990년 이른바 “세계평화축전”에 참가해 달라는 북의 초청을 받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언제 출발할 거냐?” “어머니, 저 평양 안 갑니다.” “내 아들이 그래야지.” 평소 통일론자이신 어머니도 그 깊은 속내를 숨길 수 없으셨던 것이다. 6·25 때 북의 총살로 남편을 잃었다. 어머니 나이 마흔여섯.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원한’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남북 교회는 1986년부터 만남을 시작했다. 때마다 나는 당연히 남한 교회의 대표였다. 그러나 스스로 열외에 서곤 했다. 남북 화해를 앞서 주창해 왔지만 북에 대한 가족사적 피해의식, 적대감에서 쉽게 빠져나와지지 않았다. 나와 똑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항상 그들을 생각했다. 2005년 북쪽 대표단이 현충원을 방문해서 분향했을 때 ‘오랜 원한의 고리들이 이렇게 조금씩 풀려 가는구나’, 기대와 낙관을 가졌던 것도 전쟁의 상처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갖는 특별한 감정의 한 자락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피난 장면은 우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분단체제의 모래성 위에 집을 짓고도 잘 살아온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어떤 이들은 전후 60년을 단숨에 뒤로 돌리며 이 위태로운 발밑까지 허물자고 나선다. 강력한 응징에 더해 선제공격까지, 억울한 희생에 대한 공분을 양분 삼아 한껏 부풀린 주장들을 쏟아낸다. 무책임한 소리다. 군사적 충돌이 거듭되는 악순환의 끝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이 나라의 부와 주요 산업시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인천공항에 포탄 몇 발만 떨어져도 이 나라 경제시스템에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 뻔하다. 그것을 감수하고 한판 붙자고 하는 것인가. 그들은 이 땅에 발붙이고 하루하루를 절실하게 살아가는 보통 국민은 아닐 것이다. 저 멀리 외국 땅에 안전한 피신처를 마련해놓은 사람이 아니라면 전후 60년 동안 아등바등 쌓아온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에 도박을 걸 수 있을까.
전쟁이 난다면 북쪽은 또 어떨까. 북쪽의 동포들은 또 어떻게 될까. 재래식 무기로 3년을 싸웠던 60년 전의 전쟁에 비해 새로운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는 폐허의 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또다시 물고 물리는 원한과 보복의 사슬이 앞으로 우리 민족의 수십 년, 수백 년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대응 무기를 늘리고 어떤 우발사태로 번질지 모를 대규모 무력시위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전쟁을 막고 남북이 평화와 공동번영을 향해 손잡고 가는 큰 그림은 60년 동안의 적개심, 원한이라는 인과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후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안한 정전체제 아래 있는 한반도에서 평화의 길은 단 한가지이다. 남북이 지금 서로를 정조준하는 대포를 거둬들이고 이성의 길, 동족의 길을 가는 것이다. 공멸을 피해 진정으로 상생하는 대화와 협력의 길, 이미 여러 차례 오고 가며 크게 넓혀놓은 넓고 큰 길을 가는 것이다. 이 길을 애써 버리고 왜 다른 곳에서 총질을 하며 소중한 민족의 역량과 꽃 같은 젊음들을 허방에 몰아넣고 있는가. 민족의 넓은 길, 민족 모두를 위한 큰 길, 우리 다시, 우리 함께 닦아내자.
김상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김상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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