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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말 바꾸기에 대한 희한한 해명 / 박순빈

등록 2010-12-01 20:12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1993년 12월15일 우루과이라운드(UR) 농산물협상 타결 직후의 일이다. 협상 결과에 대해 야당과 농민단체의 반발이 거셌다. 협상을 다시 해서 시장개방 이행계획서를 수정할 수 없느냐고 정부에 물었다. 국내 농가에 대비할 시간을 좀더 주자는 취지였다. 정부의 관련 책임자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

그들은 국제관례를 강조했다. 한번 합의한 협상안을 놓고 재협상을 하면 우리 쪽에 더 불리하게 고쳐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먹혀 우리 농민들은 재협상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몇달 만에 그들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가트(관세무역일반협정) 사무국에 제출한 정부의 최종이행계획서는 국내에 발표한 것과 일부 내용이 달랐다. 미국과 양자협상을 해서 이행계획서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점 하나도 고칠 수 없다며 우리 농민의 요구를 묵살한 그들이 미국의 수정 요구에는 굴복한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국무총리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며 수습에 나섰다. 청와대는 당시 재임 기간이 3개월밖에 되지 않은 김양배 농림수산부 장관을, “국민을 속였기 때문”이라며 경질했다. 이른바 ‘유아르 사태’의 전말이다.

17년 전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은 대외 통상협상을 맡고 있는 관료들에겐 악몽이면서 동시에 교훈이었다. 국민을 속였다가는 어떤 결과를 맞을지 깨닫게 해줬다. 하지만 지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나선 통상관료들에겐 ‘지워진 역사’인 듯하다. 안팎으로 협상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17년 전과 양상이 너무 비슷하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점(.)이든 콤마(,)든 협정문에 다시 찍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지난달 8~10일 서울에서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통상장관 회담을 한 뒤 말이 달라졌다. 미국 쪽 요구 때문에 협정문이 바뀔 수도 있다고. 왜 말을 바꾸느냐는 지적에, 외교통상부 최석영 자유무역협정 교섭대표는 “협상 대표가 합의된 협정문을 열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협상 전략상 아주 부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다”며 김 본부장을 변호했다. 재협상 불가론이 협상 전략이었다는 얘기다.

이 해명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동안 일부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줄기차게 제기해온 협정문의 문제 조항들도 재협상 의제로 올려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요구하는 자동차 분야 등만 다루는 ‘제한적 재협상’을, 그것도 이달 안으로 끝내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결국 재협상 불가론은 협상 전략의 하나가 아니라, 국내 비판여론 진압용으로 쓰인 셈이다.

사실 통상관료들의 말 바꾸기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이번 재협상의 쟁점 가운데 하나인 미국산 수입자동차에 대한 환경규제 면제 문제만 해도 그렇다.

김종훈 본부장은 지난 2006년 미국과 협상을 시작할 때부터 환경과 보건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타결된 협정문에도 ‘양 당사국은 자국의 환경법에 부여된 보호를 약화시키거나 감소시킴으로써 무역 또는 투자를 장려하는 것이 부적절함을 인정한다’(20조2항)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지금은 연간 판매대수가 1만대 이하인 미국산 수입차에는 환경규제 면제를 검토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시장 규모를 고려하면 영향이 미미하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무슨 환경규제가 큰 공장, 작은 공장 따로 적용할 수 있는 건가. 미국 협상단의 논리는 차라리 솔직하다. 한국 환경규제에 맞는 자동차를 따로 생산하려면 비용이 더 든다는 것이다.

통상조약을 맺기 위한 국가간 협상은 ‘이익 짜맞추기’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졸속으로 타결하기에 앞서 누구의 이익 쪽에 서 있는지 먼저 자문해봐야 한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대한민국 헌법 7조1항이다.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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