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영화 <렛미인>을 보고 나오는데 뱀파이어 소녀의 대사가 계속 아른거렸다. “나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야.” 이에 소년은 묻는다. “그럼 뭐야?” 소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린드크비스트의 원작소설엔 좀더 구체적인 답이 들어 있다. “난 어떤 것도 아니야. 남자애, 여자애가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아냐.” 스웨덴판 <렛미인> 역시 비슷한 대사를 담는다. 아이들은 ‘그럼에도 사귀자’란 결론으로 이 기묘한 성별의 상태를 뛰어넘는다. 그런데 올해의 <렛미인>은 다르다. 소녀의 성에 대한 설명이 미묘하게 원작과 엇갈린다. 감독인 맷 리브스의 각색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선택하길 끝내 거부한다. 원작처럼 거세된 상태를 내비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단정짓는 대사도 그는 넣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의 임계점을 제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탄생 이래 영화는 줄곧 흡혈귀를 갈망해왔다. 드라큘라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항상 존재하였다. ‘흡혈귀=상류층’이란 공식으로 일관하는 <트와일라잇>도 그랬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환상의 예술인 것은 다만 환등 아래에서 벌어지는 축제인 탓은 아닐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침묵의 약속이 스크린엔 녹아 있다. 깜깜한 극장에서 관객들은 카메라 너머에 형성된 막을 통해 영화를 본다. 그리고 흡사 거울에 반사되지 않는 흡혈귀처럼, 카메라는 장막에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는다. 영화를 보며 혹여 시선을 느끼더라도, 우린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린다.
드라큘라의 정체성, 그들의 몸에 대한 실제적 증거들은 이러한 관찰의 중요한 지점이 되어준다. “태양과 십자가, 그리고 마늘에 그들은 반응해.” 물론 이렇게 나열된 물리적 요인들이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이 불안감을 제거하기 위해 작가들은 구체적인 흡혈귀의 구분에 들어갔다. 1892년, 최초의 드라큘라가 등장하기 이전 발간된 소설 <카르파티아 성>이 좋은 예다.
에스에프 장르의 선구자인 쥘 베른은 죽어서도 움직이는 한 기이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색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소설의 결말에서 그는 ‘죽은 스틸라’를 살아나게 한 것이 그녀의 초상화였음을 밝힌다. 남자주인공이 특정한 각도로 유리를 움직이면, 거울이 마치 그녀가 살아난 듯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된 지 3년이 지나 뤼미에르 형제는 ‘제2의 스틸라들’을 직접 시연하는 데 성공한다. 즉, 영화가 탄생했다. 한편 1922년 첫 뱀파이어 영화 <노스페라투>가 나왔을 때, 그 속의 흡혈귀는 ‘죽어서 걸어다니는 사람’으로 명명되었다. 성별이 아닌 생사의 규칙이 그 속엔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존재를 말하기 위해, 이렇듯 예술가들은 항상 규정의 문제를 고민해왔다.
그러니 <렛미인>의 맷 리브스는 결국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지 않기를 선택한 셈이다. 이런 그의 답은 제3의 영역에 놓인다. 평이한 글엔 속임수가 있다는 스피박의 말처럼, 모든 해석에 필연적으로 오독이 따르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암묵적 합의, 그 규칙에 따라 눈앞에 펼쳐지는 사건을 다함께 바라본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고 착각한다. 이 선택은 결국 남자냐 여자냐, 밤이냐 낮이냐 하는 식의 양자택일로 갈린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치 궁극의 진실인 양 포장된다. 하지만 선택의 문제가 흑백을 넘어선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미국 영화 <렛미인>의 시작점도 그곳이다. 얼터너티브, 이는 그다지 최신의 유행도 아니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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