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본령은 선거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연장되기도 교체되기도 한다. 정권의 교체에 따라 정책과 사람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다.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보수인사가 등용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정권의 교체와 무관하게 승계되어야 할 이념과 가치가 엄연히 존재한다. 인권이 그런 것이다. 인권 담당자도 그렇다. 전문적 식견과 경험은 모든 공직에 요구되는 자격요건이다.
어느 정부치고 감히 인권의 탄압을 공공연히 표방하겠는가. 겉 다르고 속 다른 경우야 적지 않지만. 문제는 도대체 무엇이 인권인가, 정답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 같은 것일까. 시쳇말로 ‘내가 하면 사랑, 남이 하면 불륜’일까. 내용상 합의가 힘들다 보니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높다. 국제사회에서도 전쟁이나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오용하기도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도 인권, 중국에 대한 정치적 견제에도 인권이 동원되었다. 이른바 ‘북한인권’ 문제도 그런 성격이 강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련을 겪고 있다.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다. 새 정부는 출범 초부터 인권위원회를 ‘좌파정부’의 유산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시민사회도 선진사회의 적으로 삼았다. 유엔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국제인권 담론도 못사는 나라들이 작패하여 잘사는 나라의 발목이나 잡는 푸닥거리 정도로 치부했다. 정권 초에 맞은 ‘촛불집회’의 악몽이 편견을 더욱 고착시켰다. 끝내 ‘방만한 운영’을 핑계 삼아 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인력도 감축했다. 직업공무원 출신이 아닌 ‘외인부대’ 가 주된 대상이 되었다. 유력 언론도 정부 편을 들었다. 때로는 노골적인 곡필로, 때로는 침묵으로. 모든 국가기관과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은 그동안 불편한 존재였던 인권위의 무력화에 반색했다. 이 모든 사실이 사태의 악화에 기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인권이 정치에 휘둘리는 것은 국민에게는 슬픈 일이다. 성명서를 내고 집회에 나서는 각종 단체가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이들은 특정 정권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데 관심이 쏠려 있다. 정권의 부침에 무관하게 편안한 일상, 공평한 세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은 어떨까? 정부를 감시하고 건설적 제안을 하는 독립된 기관이 건재하기를 바라지 않을까?
인권위 사태는 풀어야 한다. 당장은 현직 수장의 거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부터 성찰해야 한다. 도대체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떤 기관이며, 어떤 기관이어야 하는가? 1993년 유엔총회의 결의로 채택한 권고와 원칙에 따라 탄생한 기관이 아닌가. 9년 전 ‘국제화’의 추세에 민감했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되었지만 설령 다른 후보가 승리했더라도 만들었어야 할 기관이다. 유엔의 수장을 배출한 나라라면 응당 국제적 추세를 수용했을 테니까.
인권위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세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독립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정부의 이해와 관용이다. 둘째, 독립성에 대한 인권위 구성원 스스로의 자부심과 사명감이다. 셋째, 국민이 인권위를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세 가지 조건, 그 어느 것도 취약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단 한 사람, 다름 아닌 대통령 자신이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확고한 소신이 인권위를 무력화시키는 것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가망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해결의 실마리는 남아 있다. 아직도 임기가 2년도 더 남지 않았는가. 나라 전체가 안보 문제에 함몰되어 있다. 그럴수록 국민 삶의 기본을 챙겨야 한다. 어떤 인권위를 물려줄 것인가, 진지하게 성찰하시기 바란다. 되풀이해서 강조하거니와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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