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을 지키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수리중이다. 이 동상을 두고 갖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오른손에 칼을 잡고 선 패장의 모습이라거나, 중국 갑옷을 입고 있어 고증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 등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시대 고증에는 문제가 있더라도 그대로 복원·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증에 문제가 있다 해도 조각가의 해석이 중요하니, 그 해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각가 김세중의 대표작인 이 동상에 관해 전혀 주목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동상의 좌대 부분이다. 화강암 석재로 만든 이 좌대는 수직 방향으로 장군의 동상을 받친 부분과 거북선을 받친 부분이 곡선으로 이어져 있다. 동상의 위용만큼이나 형태와 크기가 당당하다. 전체 형태가 장화 모양으로,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듯이 보인다.
이 동상에서 거북선, 좌대에 이르는 전체 조형물의 형태와 구성 원리와 유사한 예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미야자키현에 있는 일본 해군 발상지 기념비이다. 1942년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파도를 형상화한 수직의 석비 정면에 배가 놓인 형태이다. 2600여년 전 진무 초대 일왕이 군함을 모아 정벌에 나섰다는 기록에 근거를 둔 것이다. 기념비의 모양은 물론 그 앞에 놓인 배를 이순신 장군 동상의 좌대 모양과 거북선의 위치와 비교해보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유사성에 놀라게 된다. 기념비 정면에는 한자 비문이 세로 방향으로 새겨져 있어 이순신 장군 동상의 좌대와 똑같다.
조각가는 히나고 지쓰조로서, 1926년 조각과 건축을 결합한 입체조형 제작을 지향한 단체인 구조사를 창립했다. 그는 중일전쟁 이후 철저한 관변 조각가로 변신했다. 기념비를 만들기 2년 전에는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의 슬로건인 ‘팔굉일우’, 곧 전세계를 한집처럼 다스린다는 표어를 형상화한 기념탑을 설계했다. 그는 상하이에 일본 육전대의 표충탑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의 동서 양면에 새겨진 부조는 그의 작품과의 영향 관계를 알려주는 또다른 부분이다. 이 부조에는 전투에 나선 거북선 함대가 묘사됐다. 함대의 규모를 나타내기 위해 높은 곳에서 비스듬한 각도로 내려다본 부감법의 시선을 설정함으로써 많은 거북선이 등장한다. 미야자키 평화대공원에 있는 팔굉일우 기념탑의 정면 입구 문에 새겨진 동판 부조에도 똑같은 시선의 설정을 찾을 수 있다. ‘평화의 탑’으로 이름이 바뀐 이 탑은 원래 일본과 조선, 대만, 만주국 등에서 모은 석재로 만든 대규모 기념탑이다. 그 자체로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를 구현한 조형물이다.
팔굉일우 기념탑에서 정면 왼쪽에 있는 무예를 관장하는 일본의 전통신 아라미타마의 모습도 이순신 장군 동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아라미타마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이순신 장군 동상의 자태, 엄격한 표정과 오버랩된다. 활을 꼭 쥔 왼손 또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논란의 초점이 된 대목, 즉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선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바로 방패를 잡고 있는 아라미타마의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조각은 1945년 연합군에 의해 파괴됐다가 1962년 복원됐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한 때가 1968년이니 김세중이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1967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주문했다. 그때 만들어져 대한민국 권력의 심장부를 지켜온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이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의 옹호자였던 일본 조각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아이러니가 코미디로 발전하기 전에 수습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김용철 근대미술사학자·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
광화문 이순신 동상과 해군발상지기념비(오른쪽)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의 거북선 함대 부조와 비슷한 구도의 팔굉일우 기념탑 입구문과 팔굉일우 기념탑 아라미타마상
1967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주문했다. 그때 만들어져 대한민국 권력의 심장부를 지켜온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이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의 옹호자였던 일본 조각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아이러니가 코미디로 발전하기 전에 수습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김용철 근대미술사학자·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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