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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재심과 국가배상을 넘어

등록 2010-12-15 21:13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반가운 일이다.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1983년 이적단체 결성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오송회 사건’의 연루자 9명과 그 유족·가족 등 3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부는 이날 국가가 이들에게 불법행위 위자료로 207억여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앞서 이 사건 연루자들은 2008년 11월 광주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형사상 명예회복을 이뤘다. 당시 이한주 광주고법 부장판사는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광주고법에 이은 서울중앙지법 판결로 30년 가까이 그들의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는 적잖이 풀릴 것 같다.

오송회 사건처럼 공안당국의 가혹행위로 조작된 많은 사건들이 재심 무죄에 이어 민사소송에서 국가배상 판결을 받아내고 있다. 지난 10월엔 서울중앙지법에서 유신시대의 대표적 시국사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들과 그 유족·가족 등 151명이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다. 이들에게 국가가 지급해야 할 돈은 520여억원에 이른다.

국가의 불법행위로 수십년간 고통을 받은 이들에게 늦게나마 위안의 길이 열렸으니 다행스럽다. 하지만 재심 무죄와 국가배상으로 끝나는 일일까? 아니다. 우리 앞엔 아직 숙제가 놓여 있다.

먼저 지독한 고문 등으로 인간성을 무너뜨리고 거짓 자백을 받아낸 수사 당사자와 그 직접 지휘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형사처벌이 가능한지는 따져봐야겠지만, 그와 별도로 적극적으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 그들의 불법행위로 많은 이들의 인권이 침해된 것만도 분통 터지는 일인데, 그들의 잘못에 따른 배상금 수백억, 수천억원을 국민 세금으로 물어줄 수는 없다.

국가가 공무원 범죄에 대해 손해배상을 한 뒤 해당 공무원에게 구상권을 청구한 사례로는 ‘수지 김’ 사건이 손꼽힌다. 2008년 대법원은 5공 때인 1987년 남편에게 살해당한 뒤 간첩 누명을 쓴 ‘수지 김’씨와 관련해, 사건의 은폐·조작을 주도한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에게 9억1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앞서 국가는 김씨의 유족에게 45억7000만원을 배상한 뒤 장 전 부장 등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소송을 냈다.

시국사건들의 조작 가능성을 충분히 알면서도 기소권을 행사해 법의 이름으로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앞장선 검사들, 이한주 부장판사의 말처럼 ‘진실’을 밝히는 데 소홀했거나 진실을 외면한 판사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이들이야 “몰랐다”고 항변하겠지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임을 다들 안다.

독일의 ‘사법왜곡죄’ 같은 처벌 규정이 없어 법적으로 어렵다 쳐도 사회적·도덕적 책임은 물어야 한다. 그들의 이름을 분명하게 기록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인권침해의 책임이 얼마나 무서운지 후대가 교훈으로 삼게 해야 한다.


오송회 사건을 보자. 1983년 5월 이 사건의 1심 재판부인 전주지방법원은 구속 기소된 피고인 9명 가운데 6명에게 선고유예를 내려 풀어줬다. 당시 군사정권은 ‘가벼운’ 형량에 분개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두달 뒤 청와대에서 열린 대법원과의 만찬에서 이 사건을 거명하며 “빨갱이를 무죄로 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한겨레> 2010년 3월15일치 23면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만찬 3주 뒤 열린 광주고법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았던 6명은 모두 법정구속됐고, 실형을 받은 3명의 형량도 2~3년씩 높아졌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을, 정권의 눈치를 보고 1심보다 가혹하게 처벌한 항소심의 이재화 재판장(부장판사)은 서울가정법원장, 대구고법원장을 거쳐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지냈다.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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