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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보편적 복지 망국론’ 감상법

등록 2011-01-06 20:16수정 2011-01-06 21:19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건희씨 손자에게도 보육료를 지원할 필요가 있는가?”

전부터 인구에 회자되던 이야기다. 이건희씨에게 물어본 일이 없기에 당사자의 의견은 모르겠고 또한 당사자가 매우 기분나빠할 수 있는 물음이지만 최근 보편적 복지 논란에서 또다시 회자되는 물음이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정의부터 하자. 유명한 닐 길버트에 따르면 이는 “경제적 무능력 여부를 따지지 않고 급여를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과 대비되는 개념은 물론 선별적 복지이지만 모든 복지제공의 형태가 두가지만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중간의 모호한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 복지에 대해 세인들이 갖기 쉬운 첫번째 오류이다.

즉 보훈처럼 사회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경우는?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욕구가 있는지를 진단해야 하는 경우는? 경제적 능력을 조사하되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급여수준을 결정하는 경우는? 상위 10∼20%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주는 경우는? … 이 모든 것이 보편적 복지인지 선별적 복지인지를 정확히 가를 수 없는 경우다. 따라서 극단적인 양극단이 있고 나머지는 그 사이 연속선상의 어느 지점에 있을 뿐이며 상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보편적 복지는 모든 것을 공짜로 누구에게나 주자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두번째 오류가 있다. 보편적 복지의 전형이 사회보험인데,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아동수당,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이 그 예인데, 보험료나 조세로 이미 상당한 기여를 행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는 결코 ‘공짜 점심’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상당 정도 평상시의 기여함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란 모든 부문을 그렇게 하자는 것인가? 여기에 세번째 오류가 스며들 수 있다. 어느 선진복지국가도 결코 모든 복지제도를 보편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어떤 기본적인 욕구가 가장 긴요하고 완벽하게 해결될 필요가 있는지를 따져서 사회적 합의를 거쳐 핵심적인 영역을 보편적 복지로 해결할 뿐이다. 2차대전 직후 영국은 무상의료를 택했고, 1950년대 스웨덴은 아동수당을, 1980년대 핀란드는 무상교육을 대표적인 보편적 복지정책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런 오류를 제거하고 나면 보편적 복지란 한 나라의 정책 구현상의 ‘기조’이며 ‘경향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현재 왜 이런 기조와 경향성이 요구되는가? 지금까지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선별적 복지를 기조로 삼아 달려온 한국 사회가 현재 드러난 사회적 난맥상, 즉 사회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중산층의 와해, 빈곤여성·빈곤아동·빈곤노인·빈곤장애인의 대규모 존재, 인적자본의 훼손, 성장동력의 쇠잔 등등의 문제가 심화되어왔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 문제를 경제성장과 선별적 복지로 해결하자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을 문제의 해결자로 내세우는 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를 망국적 포퓰리즘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더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애초 보편적 복지가 갖고 있는 개념의 다양성과 정책의 경향성으로서의 의미를 부정하고 “부자에게 줄 필요가 없다”는 식의 경박한 개념과 경직된 정책으로 논쟁을 몰아가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의 대체개념으로 내세우는 ‘맞춤형 복지’도 생뚱맞다. 맞춤형 복지야말로 앞의 오류들을 제거하고 보면 얼마든지 보편적 복지에 해당하는 정책일 수 있으니 말이다.


재정파탄론에 이르러서는 더 할 이야기가 없다. 멀쩡한 강바닥은 시멘트로 도배를 하고 길바닥에는 ‘보편적으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다는 말 아닌가?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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