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지난 연말에 술을 많이 마셨다. 31일 밤까지 술을 마시고 나니 1일 아침부터 속이 쓰리고 가슴이 뛰었다. 새해라고 해서 특별한 결심 같은 걸 안 한 지 3~4년 됐다. 내 의지력의 강도를 알아버렸다고 할까. 결심을 못 지키는 자신에게 실망조차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하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자’라기보다 ‘하지 말자’에 가깝다. ‘술을 자제하자!’ ‘술 몇 병 이하’ 또는 ‘며칠에 한번 마시기’ 따위의 목표치도 두지 않기로 했다. 술자리 가기 전에, 술자리에 앉아서 한두 번 정도 ‘자제하자, 천천히 마시자’고 되뇌는 거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덜 마시면 덜 마셨지 더 마시진 않겠지.
뉴스를 보다가 ‘하지 말자’류의 소극적 결의를 하나 더 추가하기로 했다. 흥분 안(혹은 덜) 하고 냉소 안(덜) 하기. 새해 벽두부터 논란이 된 종합편성채널 사업자 선정 발표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내년의 총선·대선을 앞두고 전열을 정비했음을 알리는, 여권의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가뜩이나 다가올 선거는 선거라기보다 전쟁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왜 안 그러겠나. 10년 만에 권력을 되찾았다는 현 정부는 지난 정부의 사람들을 무리하게 수사해 무죄판결을 받게 하고, 무리하게 쫓아내 복직판결을 받게했다. 그러는 사이 전직 대통령이 자살까지 했다.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정권 바뀌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살기는 전염된다. 어느 한쪽이 살기를 품으면 다른 쪽도 품을 수밖에 없다. 매 선거가 그랬겠지만 내년의 선거는 더 살기등등할 것 같다. 권력에서 떨어져 있는 보통사람들도 이번엔 다를 것 같다. 그 많은 자리에 사람들이 바뀌었는데,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이들이 바로 자기 주변에 있음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덤비는, 전쟁 같은 선거의 계절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조짐들이 종편 문제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보인다. 전쟁이 시작되면 중립지대는 좁아진다. 어느 편이냐를 묻고, 득실을 따질 거다. 거리를 두고 사안을 바라볼 여유도 줄어들 거다. 어느 한편에 속해 열심히 흥분하거나, 아니면 등 돌리고 냉소하거나 둘 중 하나이기 쉬울 텐데…, 그래도 그러지 말자고? 내 결의는 그럴수록 그러지 말자는 거다.
<교수신문>이 매년 뽑는 ‘올해의 사자성어’는, 보수든 진보든 모든 매체가 비중있게 보도해 왔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2001년부터 뽑기 시작해 10년을 맞았는데, 내겐 처음 4년 정도가 재미있었다. 2001년 ‘오리무중’, 2002년 ‘이합집산’, 2003년 ‘우왕좌왕’, 2004년 ‘당동벌이’. 어느 길이 옳은 길이고 어느 편이 내 편인지 막막해서(오리무중), 이리 뭉치고 흩어졌다가 저리 뭉쳤다 흩어지고(이합집산), 이리저리 헤매다가(우왕좌왕), 이제야 찾았다는 듯 내 편이라고 똘똘 뭉쳐 다른 이들을 배척한다(당동벌이)…. 한국 사회에서 정파의 구성이 얼마나 엉성하게 이뤄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정치이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혈연·지연 등의 이해관계로 얽혀놓고는 똘똘 뭉쳐 당동벌이하고…. 지금도 그러지 않나.
양비론이 아니다.(‘당동벌이’라는 말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에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혔지만, 그해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뭉쳐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고 했다.) 진보 대 보수이든, 여야든, 어떻게 나누든 나도 중립은 아닐 거다. 하지만 확실한 소속감을 공유할 수 있는 현실의 어떤 진영도 없다. 대다수가 나와 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무리 전쟁 같은 선거가 시작됐다 하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사안별로 냉정하게 따지고 공사 구별하는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같은 사안을 두고 같은 비판을 되풀이하고, 그러면서 표현만 과격하고 경솔해지는 일들을 보면 이게 거꾸로 비판받는 대상을 돕는 일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여하튼 나는 ‘흥분하지 말자, 냉소하지 말자’고 수시로 되뇌자고 마음을 먹는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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