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란 여전히 어색한 직함을 달고 취재 현장으로 돌아간 지 4년이 되어간다. 그전에는 신문사에서 주로 지시를 하는 일만 해왔으니 직접 취재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20, 30대의 젊은 기자처럼 매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일을 하기가 간단치 않아 현안에서 좀 벗어난 주제들을 쫓아다녔다. 구차한 자기변명을 하자면 오랜 기간 묻혀 있어 젊은 기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다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대상에 70, 80대의 노인들이 많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과 얘기해보면 건강, 기억력, 평소 습관, 받은 교육의 정도에 따라 내용의 구체성, 밀도, 정확도 등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구름 잡는 듯한 얘기만 듣고 돌아온 적도 적지 않다. 만난 지 얼마 뒤 부음이 들려오기도 했고, 얘기를 좀 더 확인하려고 다시 찾아가면 이전의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이 날 때마다 어른들을 찾아뵈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지만 제대로 실천을 하지 못한다.
작년 말부터 리영희 이돈명 박완서 선생 등 이 사회의 어른이라 할 만한 분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고 있다. 마음씨 좋은 시골 이장 같은 인상의 이돈명 변호사는 전두환 정권 시절 자신이 숨겨주지 않았는데도 범인은닉죄를 뒤집어쓰고 감옥까지 갔던 분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이 변호사에게 “거짓말을 어찌 그렇게 잘하시냐”고 농담을 건넸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2004년 5월 유현석 변호사의 빈소에서 만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때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 변호사가 오랜 벗의 부음을 듣고 달려와 우두커니 앉아 있던 모습이 너무도 아프게 느껴졌다. 두 분은 원로 인권변호사이자 오랜 기간 천주교 인권운동을 같이 해왔다. 나이는 이 변호사가 연상이지만 법관 임관은 유 변호사가 빨라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이 변호사의 인간적 풍모에 대해 한 일본인 학자로부터 들은 일화가 있다. 1970년대 초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서승·서준식 형제의 구원활동을 벌여온 야마다 쇼지라는 분이다. 당시에는 일제 때의 예방구금제도와 비슷한 사회안전법이 실시되고 있어 ‘사상범’들은 형기를 마치더라도 전향하지 않으면 2년마다 보안감호 처분을 받게 돼 있었다. 서준식은 확정된 7년 징역형을 마치고 보안감호소로 이감됐다.
이 변호사는 보안감호 처분이 갱신될 때마다 처분취소 소송을 냈지만 번번이 기각됐다. 그는 어느 날 변호사 선임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호소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서군 형제들이 언젠가 민주화가 되면 감옥에서 나올 날이 있을 거다. 그렇지만 내가 예언자가 아니니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참고 견디라고 잔혹하게 말할 수도 없고 양심에 거역해서 전향서를 쓰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아프니 그만두게 해 달라.”
이 변호사의 인품에 탄복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던 터라 야마다 명예교수에게 부음 기사가 실린 국내 신문을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하긴 야마다 교수도 우리식 세는 나이로 하면 82살의 고령이다. 그는 일본이 아직도 과거사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스스로 채찍질을 한다.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에 관한 책의 개정판을 내려 하고 전쟁책임 문제도 폭 넓게 다루고 싶다고 했다. 그는 90살을 한도로 보고 앞으로 4~5년 사이에 해야 하니 큰일이라고 하면서도 강한 의욕을 감추지 않는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민주화의 성과가 너무나 쉽게 허물어지고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는 탓인지 어른들의 타계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분들이 하신 일의 만분의 일, 아니 백만분의 일이라도 해보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수밖에.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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