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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임범의 노천까페] 한국 영화, 갑의 실종

등록 2011-02-11 19:53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한 젊은 영화작가의 죽음이 보도된 뒤 영화계의 문제점들이 다시 도마에 오른다. 영화인 실업구조, 사전 개발비 지원 등의 대안들이 논의된다. 어느 하나라도 빨리 결실을 보기를 바라는 건 두말할 나위 없지만, 그 죽음을 접한 뒤 내게 다가온 가장 큰 답답함은 이거였다. 계약 당사자를 갑(고용자)과 을(피고용자)이라고 할 때, ‘을’이 저렇게 처참하게 생활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물을 ‘갑’이 없다는 것이었다.

영화판에서 갑이 누군가. 당연히 시나리오를 사고, 감독과 스태프들을 고용하고, 배우들을 캐스팅해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이다. 제작자가 없다고? 있는데 힘과 자본이 있는 제작자가 없다. 3~4년 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느새 모두가 영세해져 1년에 영화 한 편 만들기가 버겁다. 정직원이 사장 포함해 두세 명인 경우가 허다하다. 대부분이 프리랜서 제작자에 가깝다. 그러니 사람을 죽게까지 만든 시스템의 결함에 대해 책임을 묻기가 민망할 정도다.

이태원 전 태흥영화사 사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편제> <태백산맥> 등 1980~90년대에 중요 작품들을 제작했던 이다. “나는 내 돈으로 영화 만든 사람이야. 요즘처럼 남의 돈 끌어다 만드는 이들과는 달랐다고.” 전에는 제작자가 자기 돈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영화의 편당 평균제작비가 30억~40억원까지 뛰어오르면서 오로지 자기 돈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됐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대기업이 투자자로 영화계에 들어오고, 영화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펀드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제작자는 자기 돈 없이도 투자자의 돈을 받아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최소한의 종잣돈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자. 제작사가 개발한 시나리오 가운데 영화화되는 건 전체의 24% 정도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4편의 시나리오가 개발된다는 말이다. 영화화된 시나리오의 개발비는 투자금액에서 충당하겠지만, 나머지 세 개의 개발비는 제작자가 안아야 한다. 그러려면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또 보자. 한국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는 영화가 열 편 가운데 1.5편이다. 영화로 돈 벌려면 7~8편을 만들어야 그중 하나가 흥행한다는 말이다. 1년에 한두 편 만들어서는 개발비를 제대로 쓰기가 쉽지 않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열리면서 2000년대 초중반엔 1년에 5편 이상 만드는 제작사가 서너 곳이 됐고, 세 편 이상으로 치면 열 곳 정도 됐다. 그렇게 영화를 굴리면서 그중에 흥행작이 나오면, 그 돈을 재투자해 개발비 문제를 해결해왔다. 이때는 한국 영화 산업에 나름의 시스템이 있었다. 만약 그때 젊은 영화작가가 이번처럼 세상을 떠났다면 상당수 제작자가 여론 법정의 피고인석으로 불려나왔을 거다. 그런데 2006년부터 영화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 제작 편수가 절반 가까이로 급감했다. 그와 동시에 1년에 세 편 이상 만드는 제작사가 사라졌다.

전에는 팽팽했던 제작자와 투자자의 역관계도, 투자자의 압도적인 우위로 바뀌었다. 감독들 사이에선 시나리오를 제작자에게 가져갈 필요 없이 투자자에게 바로 가져가는 게 낫다는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 투자자들은 스스로 제작을 하지 않고 있다. 준비는 한다고 하는데 나오는 게 없다. 그러니 (영화화 안 된) 나머지 세 편의 개발비는 누가 충당할까.

물론 아무리 군소 제작사라도 사람을 쓰려면 합당한 돈을 줘야 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는 짚어야 한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열린 지 10여년이 지나 남은 건 왜소한 제작사와 공룡 투자사이다. 그래도 산업만 잘 돌아가면 뭐라 그러겠냐만, 이 풍요의 시대에 사람이 굶어죽을 만큼 영화계는 춥고 배고프다.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쉽지 않지만 분명한 건, 영화 제작에 재투자를 하는 사람에게 이윤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이윤을 챙긴 사람이 재투자를 하든가. 어느 산업이든 그게 상식 아닌가.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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