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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소의 눈물, 농부의 눈물 / 정재권

등록 2011-02-16 19:38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정재권
사회부문 편집장
‘뒷산에 올라 웅덩이라도 파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페이스북으로 몇해 만에 소식을 접한 친구는 ‘담벼락’(글을 쓰는 공간)에 이렇게 써 놓았다. 답답함과 울분, 분노가 절절하다. 구제역 때문이다.

1980년대 대학 시절 학생운동으로 구속됐고, 그 뒤 한동안 민주화운동을 뒷바라지하는 일을 했던 말수 적고 착하디착한 친구였다. 10년도 훨씬 전에 사과 농사를 하겠다며 경북의 고향마을로 내려갔는데, 연락이 뜸했던 사이 소를 키운 모양이다.

덜컥 걱정이 들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구제역이 석달이 다 되도록 진정 기미가 없어도 그저 남의 일처럼 여겼는데 이제야 내 일처럼 다가왔다. 부랴부랴 소들의 상태를 물으니, 다행히 50여마리 모두 매몰처분을 피했다고 한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의 지난 석달이 ‘운’이 아니었음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집과 축사, 구제역 상황실 등을 오줌 눌 틈조차 없이 오가며 구제역과 사투를 벌였을 게다.

친구의 글을 읽으며 뒤늦게나마 ‘농민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동안의 무신경에 미안했고, 구제역에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정부와 정치권에 화가 났다.

구제역은 ‘단군 이래 최대의 재앙’으로 우리를 덮쳤다. 도살된 소·돼지가 300만마리를 훌쩍 넘어, 1차 피해 보상액과 백신접종비만 2조~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뚜렷한 환경 대책도 없이 허둥지둥 언 땅에 묻는 데 급급해 전국의 매몰지들이 보완이 시급하다는 조사가 속속 나오고 있다.

날이 풀리면 토양과 하천, 지하수 오염, 그리고 이로 인한 질병의 발생 등 2~3차 오염이 다시 우리를 덮칠 게 분명하다. 이런 환경재앙이 가져올 경제적 손실은 추정조차 하기 어렵다. 적어도 10조원에서 많게는 수십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이 벌써부터 나온다.

이미 지난달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한국의 구제역은 최근 50년 동안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경제수석을 단장으로 하는 구제역 태스크포스를 지난 주말에야 꾸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늑장대응의 금메달감이다. 한나라당은 설 명절에 전국 곳곳에서 ‘성난 농심(農心)’을 들었을 텐데도 설 뒤 개헌 타령으로 날을 지샜다. 수조원의 추경예산 편성이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국민의 비난과 대통령의 사과, 관련 부처 장관들의 무더기 문책 등이 두려워 정부·여당이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의심마저 떠돌고 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찢긴 농부의 마음이다. 평생을 키워온 소·돼지를 땅에 묻고, 텅 빈 축사 앞에서 넋을 잃고 있다. 소·돼지를 묻은 그 땅마저 아무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한다. 이런 농민의 절망을 달래주지 못하면 우리는 수십조원을 쏟아부어도 결코 되찾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잃게 된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 더불어 살고 있다는, 공동체 정신이라는 가치 말이다.

농부에게 소는 어떤 존재일까.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얼마 전 국회에서 축산농가가 구제역 대처에 소홀하다고 지적하며 “경찰이 백날 도둑을 지키면 뭐하나. 집주인이 도둑 잡을 마음이 없는데”라고 나무랐다. 한데 졸지에 꾸지람의 대상이 된 축산농꾼 친구는 설 직전 소 4마리를 팔 때의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소 네 마리를 실어 보냈다. 내 손으로 받아서 33~34개월을 키웠다. 공판장을 거쳐서 그 누군가의 설을 기쁘게 해줄 거다. 소는 자기가 가는 곳을 알고 차에 오를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정말 그런지 궁금했지만 차마 그 눈을 쳐다보지 못했고, 대신 내 눈에서 눈물이 났다. 남들도 자기가 울고 그렇게 말하기 뭣하니 소가 그랬다 하나 보다.’

소를 내다 파는 농부의 마음이 이럴진대, 그냥 땅에 묻어야 하는 이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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