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자
정강자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전 여성민우회 대표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전 여성민우회 대표
2월16일 10개 정부부처와 13개 시민사회단체 실무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유엔에 제출할 자유권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국가보고서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이 보고서는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변화된 인권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참석자에 따르면 최근 2년간의 국가인권위원회 사태도 쟁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정부는 자유권위원회, 사회권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등 유엔의 각 규약위원회에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때 인권위는 사전에 보고서를 검토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 인권기구 자격으로 국내 인권 상황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를 낼 수 있다. 인권에 관한 한 유엔도 국가인권기구의 독자적 위상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인권위가 지금 한국에서는 논란의 초점이 되어 급기야 유엔에 보고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도대체 인권위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인권위는 설 명절 직전 9년간 일해온 계약직 조사관을 해고했다. 그는 인권위 내부에서 손꼽히는 조사 전문가이자 인권위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여성인권 전문가다. 이에 무려 60여명의 인권위 직원들이 실명으로 현병철 인권위원장에게 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공무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며 릴레이 1인 시위와 언론 기고를 강행하고 있다. 인권위 노동조합도 검은 옷차림에 국화꽃을 들고 인권위원장과 사무총장을 상대로 진정을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축제가 되어야 할 출범 10주년에 암담한 빈소로 전락한 인권위를 지켜보면서 인권위원을 지낸 필자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인사는 기관장의 고유 권한일 수 있다. 그 권한은 어디까지나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행사돼야 한다. 인권위 직원들은 이번 해고 조처에 대해 인권위가 그동안 세워온 인권기준과 배치된다고 보는 듯하다. 비정규직을 앞장서 보호해야 할 조직이 차별의 칼날을 들이대고, 인권위원장에게 쓴소리 좀 자주 했다고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보복하고, 파리원칙과 국제인권기준이 강조하는 전문성과 다양성의 원칙을 일거에 허무는 폭거로 느끼는 것이다.
필자는 인권위가 해고한 조사관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2002년 서울지검 피의자 사망사건 당시 그는 무소불위의 공권력과 당당히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2005년 서울 구치소 수용자 사망사건 때는 신속한 조사와 판단으로 구금시설 인권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첨예하게 맞섰던 수많은 성희롱·성차별 사건 때마다 그는 인권기구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선례를 만들어왔다.
인권위에서 조사관은 실로 막중하다. 조사관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사건은 묻히기도 하고 파장을 부르기도 한다. 차별사건의 경우 조사관의 인식은 인권위원의 판단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조사관의 경험과 전문성은 조직이 축소된 인권위에서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할 자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권위는 이번 인사에서 여성인권 조사관 전원을 교체하고 마지막 남은 전문가를 해고하는 실수를 범했다. 장담하건대 당분간 인권위에서 여성인권이나 성차별 문제에 대한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2년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권위를 떠났다.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조직 축소로 직장을 잃었고, 추태에 실망해 스스로 일터를 버렸고, 고통스럽게 남아 있던 이들이 강제로 쫓겨났다.
지난해 11월 전임 인권위원들은 현 위원장에게 경고했다. 인권위가 이미 위기에 빠졌으니 위원장 스스로 결단하라고 촉구했다. 전임 인권위원들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수신자는 답을 주지 않고 있으나, 메시지를 보내는 이들은 계속 늘고 있다. 파국이 임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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