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섬진강에 매화 피었다는데…

등록 2011-03-06 20:02수정 2018-05-11 15:10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정읍에 사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살짝 들뜬 목소리로 “섬진강에 매화 피었다는데…” 했다. 밤에 잠이 들 때도 고단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줄 내가 잘 아는데, 이 양반이 웬 매화타령인가 싶어 ‘팔자 좋은갑소’ 해버렸다. 한번 내려오라는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길 떠나기가 무서웠다.

전국 방방곡곡 지나가는 길마다 돼지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서였다.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돼지고기, 그러니까 먹이로만 생각했던 돼지의 얼굴이, 귀와 코와 눈과 뺨과 꼬리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생매장에 처한 돼지의 모습은 각기 달랐고, 각자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기주장을 담은, 우리 인간의 얼굴과 다르지 않은, 고사상의 돼지머리가 아닌, 살려고 몸부림치는 얼굴들이었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끔찍한 지옥도를 보고 구역질과 분노와 슬픔으로 울적한 나날을 보냈다.

사람도 아닌 돼지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은 내가 돼지띠여서일까. 그것은 아니다. 돼지의 얼굴에 사람의 얼굴이 겹쳐지고, 우리의 인생도 궁극적으로는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영문을 모르는 채 어떤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돼지와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평생 돼지고기를 입에 넣지 않겠다는 결심은 어디 가고 언젠가는 삼겹살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밀려와서다.

시몬 베유는 여섯살에 설탕 섭취를 거부했고 결국은 음식을 최소한만 섭취하다가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누군가는 그것이 없어서 죽는데 그것을 먹을 수 없다는 연민과 연대의 감정이입 때문이었다. 극단적으로 엄격한, 실천하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던 그는 ‘관심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값진 관대함의 표출’이라고 한 적이 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간섭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해와는 무관한 일에 관심을 갖고 간섭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규정했다. 옛 선비들은 ‘지행합일’이라고 하면서 아는 것은 행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은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러한 지식인의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다.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너나 잘하세요’ 식으로 반응한다. 서로 나누고 토론해야 할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거나 간섭을 하려 들면 불편해하는 풍조가 체질화되어가고 있다.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때문이다. 모든 논의와 문제제기는 정치색깔로 치부해버리고 일단 정치적이라고 밀어붙이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대통령부터 이익집단의 보스처럼 행동하고 정치인, 관료, 법조, 의사, 교수, 종교 등 전문직부터 말단 조직까지 모두 이익집단화되어 아무도 간섭을 안 받으려 하고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내 밥그릇에 숟가락 놓는 일만 아니면 외면한다. 언론이야말로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관심을 보이고 간섭을 하는 게 본래의 사명일 것이다. 세상의 문제에 간섭을 안 하면 언론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 사회는 죽은 사회일 텐데… 나는, 우리는 돼지처럼 그냥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인가….

몇날 며칠을 웅크리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우울증이 겹쳐서 바닥을 헤매다가 길을 떠났다. 칠십 먹은 살기 팍팍한 혼자 사는 여인의 매화꽃 타령이 이 아니 신선한가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어 먹었다. 김용택 시인의 ‘봄날’처럼 하던 설거지 내동댕이치고 집밖에 쓰레기봉투를 잔뜩 흩뜨려놓은 채 섬진강 물빛 따라 매화꽃 구경을 떠났다. 바람은 못 피워도 봄날의 바람기는 느껴보는 호사스러움을 허용하지 않으면 삶이 피폐해질 것 같아서였다.

섬진강엔 아직 매화꽃은 피지 않았고 남해엔 동백이 불쑥불쑥 붉은 꽃덩어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엷게 연녹색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산과 들과 물을 보면서도 땅밑의 동물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봄구경은 했다. 언론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1.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사설] 버티고 잡아떼는 윤석열, 더 이상 국민들 부끄럽게 말라 2.

[사설] 버티고 잡아떼는 윤석열, 더 이상 국민들 부끄럽게 말라

“재판관 임명 불가” 궤변, 탄핵심판까지 방해하는 국힘 [사설] 3.

“재판관 임명 불가” 궤변, 탄핵심판까지 방해하는 국힘 [사설]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4.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5.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