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기 문학평론가
정현기 문학평론가
아주 오랜만에 ‘염치’에 대한 맑은 얘기를 읽었다. <한겨레> 2월28일치 23쪽에 임헌영 형의 친일청산 작업과 관련한 얘기였다.
‘부끄러움’은 사람됨의 본보기 잣대가 될 만하다. 임 형의 이야기는 참으로 신선했다. 그는 ‘문학이 내 고향인데 지금은 하숙집 신세’라고 했지만, 내 느낌으로 그는 도도하고 당당한 자기 문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왔다.
그처럼 어려운 길을 멈추지 않고 걷기란, 결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데도, 그는 그 길을 걸어왔다. 이 나라의 한 복이다.
오늘날 우리는 부끄러움을 잃은 시대에 내동댕이쳐진 채 살고 있다. ‘염치없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실은 그렇다. 염치없는 사람을 우리는 사람 격에서 제쳐놓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염치를 아예 집어던진 채 행악을 벌이는 부라퀴들을 눈 뻔히 뜨고도 내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다, 그런 이들을 가차없이 우리는 내던진다.
참으로 우리들 삶은 묘하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몇 낱의 지워지지 않는 짙은 그림자가 있다. 그것은 왕이라는 낱말로 모아진다.
왕, 영웅, 지도자, 대통령, 수상 따위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사람들 마음속에 파고드는 이 낱말은 자세히 따져보면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는 그런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런 패들은 대체로 깡패이거나 강도들이기 쉬운 사람들인데, 하도 오랫동안 그런 패들에게 억눌림을 당해 와서 그런지, 으레 사람들 마음에는 그런 왕 벌레가 자리잡고 있다.
지도자란 어떤 무리에게든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래서 힘이 세거나 머리가 좋아 남들보다 먹잇감을 찾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이면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른다. 그를 따를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보호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런 지도자는 먹는 것, 입는 것, 누리는 재산도, 남들보다 더 먹고 입거나 번쩍거려도 된다고 믿는다. 여기에 참혹한 함정이 놓여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진 사람들 가운데 가장 참혹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쩌다가 떠밀려 군중 앞에 서게 된 지도자? 자기 함정에 빠진 미친 대통령? 히틀러? 무바라크? 카다피?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다음은 누구일까? 재산을 너무 함부로 긁어모은 사람들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그 함정에 빠진 사람들일 터인데, 그들은 그것을 성공한 삶이라고 착각한다. 얼마나 되는 돈이 정말로 자기가 힘들여 번 바른 재산일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 전에 젊은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그걸 미리 정해놓지 못한 채 재산을 너무 많이 가진 자들을 잡아 죽이는 바람에, 재산을 조금 가진 동료에게 역습당해, 죽었다는 증언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명박 정권이 툭하면 재산을 늘린 사람들을 층층다리 벼슬자리에 앉혔다가 번번이 망신당하는 개각놀음을 지켜보고 있다. 꼭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다. 굶주리며 헐벗은 이들, 앞날에 대한 아무런 보장조차 없어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널려 있는 우리 시대에, 정말 잘사는 삶의 잣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렇게 일러둘 필요가 있다. 내가 누리는 삶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그것은 잘 못사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잘사는 삶의 잣대가 되는 시대를 우리는 열어가야 한다. 염치없는 사람일수록 남 앞에 나서기를 즐긴다. 잘 지켜볼 일이다.
그래서 그런 지도자는 먹는 것, 입는 것, 누리는 재산도, 남들보다 더 먹고 입거나 번쩍거려도 된다고 믿는다. 여기에 참혹한 함정이 놓여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진 사람들 가운데 가장 참혹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쩌다가 떠밀려 군중 앞에 서게 된 지도자? 자기 함정에 빠진 미친 대통령? 히틀러? 무바라크? 카다피?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다음은 누구일까? 재산을 너무 함부로 긁어모은 사람들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그 함정에 빠진 사람들일 터인데, 그들은 그것을 성공한 삶이라고 착각한다. 얼마나 되는 돈이 정말로 자기가 힘들여 번 바른 재산일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 전에 젊은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그걸 미리 정해놓지 못한 채 재산을 너무 많이 가진 자들을 잡아 죽이는 바람에, 재산을 조금 가진 동료에게 역습당해, 죽었다는 증언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명박 정권이 툭하면 재산을 늘린 사람들을 층층다리 벼슬자리에 앉혔다가 번번이 망신당하는 개각놀음을 지켜보고 있다. 꼭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다. 굶주리며 헐벗은 이들, 앞날에 대한 아무런 보장조차 없어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널려 있는 우리 시대에, 정말 잘사는 삶의 잣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렇게 일러둘 필요가 있다. 내가 누리는 삶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그것은 잘 못사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잘사는 삶의 잣대가 되는 시대를 우리는 열어가야 한다. 염치없는 사람일수록 남 앞에 나서기를 즐긴다. 잘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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