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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FTA 번역 오류 사태의 단상 / 박순빈

등록 2011-03-23 19:59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협정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문제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의 번역 오류가 터져나올 때마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쪽 반응은 이랬다.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가 협정의 한글본과 영문본이 일치하지 않는 대목을 처음 제기했을 때 통상교섭본부는 당황했다. 완구류와 왁스류 등 일부 공산품의 원산지 기준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통상교섭본부는 영문본을 한글본으로 번역하면서 생긴 ‘실무적 실수’라고 했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해 10월 국회에 제출했던 비준동의안을 철회하고 실수한 대목을 고쳐 지난 2월28일 다시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무더기 오류(<한겨레> 3월7일치 1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자, 통상교섭본부는 오류를 밝혀낸 송 변호사나 이를 보도한 <한겨레>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꺼번에 터뜨리지 왜 드문드문 내놓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몇몇 여당 의원들한테는 “자꾸 번역 오류 문제를 제기해 국회 비준동의 절차를 막으려는 의도”라고 해석해주며, 협정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인 만큼 동의 절차를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다.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유럽연합 쪽 교섭대표와 구두로 합의한 잠정 발효 시점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7월1일이다. 국회 일정을 고려할 때 김 본부장의 구두합의가 지켜지려면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쪽 통상교섭 대표끼리의 구두합의는 아무런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다. 따라서 국회는 협정문에 다른 오류가 없는지 철저하게 살펴보고, 정부가 주장하는 ‘협정의 본질’도 따져볼 의무가 있다.

자유무역협정은 체결 당사국간 상품·서비스 교역, 또 투자와 관련한 여러 장벽들을 허무는 경제통합조약이다. 양쪽 기업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의 사회·경제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우리 헌법은 대외조약을 법률로 인정한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을 국회에서 비준동의하면 무려 700여쪽에 이르는 대형 법전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협정 발효 뒤 바뀌어야 하는 국내 법률도 10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협정문의 한글본이 오류투성이라는 사실은 중대 문제다. 오류를 분석해보면, 단순 실무적 착오로 설명하기 어렵다. 통상교섭본부가 국내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피하려고 일부러 옮기지 않거나 왜곡했다는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 많다. 김종훈 본부장이 “협정문 어디에도 그런 조항은 담지 않았다”고 장담했던 ‘래칫’(역진 방지) 조항을 한글본에서는 슬쩍 빼버린 게 대표적인 사례다. 래칫(ratchet)이란 톱니바퀴에서 한쪽 방향으로만 회전하고 반대방향으로 돌지 못하게 막는 장치로, 자유무역협정에선 정부가 협정 상대방에게 새로운 규제를 할 수 없도록 못박는 것을 뜻한다.

이런 장치는 국가기관의 공적 기능을 약화시켜 통상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지난 22일 한글본의 번역 오류 160곳을 추가로 찾아내 발표하면서, 최혜국 대우 면제를 규정한 부속서에 래칫 조항의 핵심 문구인 ‘그 개정 직전에 존재하였던 바로서’(as it existed immediately before the amendment)는 통째로 빼먹은 사례를 지적했다.

번역 오류 사태에 대한 통상교섭본부 관료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이 과연 대한민국 국민의 심부름꾼인지 의심이 든다. 추가로 밝혀진 오류도 유럽연합 쪽에는 곧바로 통보해 수정하면서, 국회에 계류된 비준동의안은 그대로 처리하자고 한다. 전문가가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글본 조항을 지적하면, 영어본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과 기업들은 한글로 된 법률을 기반으로 경제활동을 한다. 통상교섭본부 관료들 머릿속에선 법치주의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국민한테만 적용되는가.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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