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발생 이후 일본의 지인들에게서 오는 전자메일에는 재앙의 여파가 묻어나왔다. 원고를 급히 마감해야 하는데 언제 전기가 끊길지 몰라 불안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공포의 대상이 지진과 해일에 의한 직접피해에서 방사능 유출에 따른 무형의 피해로 옮겨가면서 일본 정부와 업체의 대응방식에 대한 분노와 낙담의 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정부의 발표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사설 연구기관인 ‘원자력자료정보실’ 누리집을 쭉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1975년 문을 연 원자력자료정보실에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목마른 일본 시민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이 단체는 핵재앙의 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여러 차례 메시지를 발표하고 관련 정보와 전문가들의 분석을 수시로 누리집에 올렸다. 초기부터 사태 성격에 대해 원전 설계 때 상정했던 조건을 벗어난 지나치게 가혹한 사고라고 규정했다. 안전한 대피 범위를 묻는 질의가 쏟아지자, 일률적으로 몇 킬로미터 밖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으니 방사선 방출량, 원전 내 격납용기, 압력용기 등의 내부 상황에 대한 상세정보를 실시간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했다.
원자력자료정보실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 ‘시민과학자’ 로 추앙받는 다카기 진자부로다. 다카기 박사는 2000년 62살의 나이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다. 도쿄대에서 핵화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 내 원자핵연구소 조수를 거쳐 도쿄도립대 조교수로 채용됐고, 독일의 막스플랑크핵물리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내기도 했다. 73년 도쿄도립대에 사표를 던진 것이 35살 때였다. 그리고 원자력자료정보실을 만들어 상근자로 일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7년 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은 핵연료 자급자족 계획인 ‘핵연료 사이클’을 추진한다고 들떠 있을 때였다. ‘꿈의 원자로’로 불리던 고속증식로 실험을 통해 우라늄238이나 플루토늄을 연료로 쓰는 동시에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롯카쇼에 대규모 핵재처리시설을 가동해 핵연료의 자급을 꾀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다. 난관이야 있겠지만, 무한히 진보하는 과학기술력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것이 추진론자들의 견해였다.
단아한 인상의 다카기는 부드러운 어조로 질문에 답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관한 부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일본이 고속증식로 실용화에 대해 남다른 비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이 “아직 쓰라린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를 하는 정치적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불행히도 다카기의 진단은 어긋나지 않았다. 85년 10월 착공된 고속증식로 원형로인 ‘몬주’는 91년 5월에 시운전을 시작했지만 95년 냉각재로 쓰이는 나트륨 유출 사고로 15년 넘게 가동이 중단됐다. 다카기는 한국과 일본의 당국이 원전 건설과 관련해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지만, 문제의식을 갖는 두 나라 시민단체들 사이의 교류는 대단히 낮은 수준에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국 쪽 반핵단체의 내부 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문지식을 가진 과학자가 자신의 직을 버리고 수준 높은 조사와 운동에 뛰어드는 사례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를 만난 지 1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과문한 탓인지 그런 얘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다카기가 숨을 거둔 그해 연말 그의 이름을 붙인 ‘다카기 진자부로 시민과학기금’이 만들어졌다. 유족들이 낸 유산과 그의 삶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헌금을 토대로 기금을 설립한 것이다. 목적은 현대의 과학기술이 가져온 문제·위협에 대해 ‘과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비판할 수 있는 시민과학자’를 육성 지원하는 것이다. 지난해 3월까지 모두 154건, 8300만엔을 집행했는데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스리랑카·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국의 개인이나 단체가 지원을 받았다. 새만금 물새 관찰 계획도 지원 목록에 들어 있다. 한 지식인이 뿌린 씨가 꾸준히 열매를 맺어가는 게 부럽다.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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