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현 에디터부문장
아직 잠이 덜 깬 출근길. 경기 일산새도시 문촌마을을 지날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소진.
소설 <자전거 도둑>에서 그는 자전거를 훔쳐 타는 ‘예쁜 도둑’ 서미혜를 등장시킨다. 그녀는 “문촌마을 스포츠센터에서 에어로빅 강사를 한다”고 했다. 어느 틈엔가 ‘문촌마을=김소진’이 머릿속에 박혀버렸다. 소설의 화자 김승호가 앉았던 안장 위에 가끔씩 서미혜가 앉아 자전거를 탄다. 관능적이다. “까만 타이즈 바지 차림에 흰 남방셔츠를 입고 있어 늘씬한 몸매가 훤히 드러났다”고 소설은 말한다. 일산의 호수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을 볼 때도 가끔 소설 속 서미혜와 함께 김소진을 떠올린다.
이맘때처럼 하얀 목련이 피던 1997년 4월 어느날, 김소진은 암으로 세상을 떴다. 목련은 소복을 입은 듯했다. 신문사 교열부에서 일하던 그가 아직도 기억난다. 하지만 일상적 모습의 김소진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소진됐다. 그가 편집자이던 내게 ‘불을 당기다’가 아니라 ‘댕기다’가 맞다고 말했던가 아니던가. 그는 말을 약간 더듬었던 것 같긴 한데, 그랬던가 아니던가.
소진된 기억의 한편에서 그를 떠올린 것은 다른 계기였다. 베란다 한편 응달에서도 기어코 양파가 새싹의 촉을 밀어올리듯, 김소진에 대한 기억은 전혀 다른 곳에서 시퍼런 촉을 내밀었다.
이른바 ‘치사·분신정국’이라 불렸던 91년 봄, 강경대·김귀정·박승희 등 10명의 ‘열사’가 희생된 지 올해로 20주기를 맞았다. 그들의 투쟁은 87년 6월항쟁에 이어 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보수대연합 정권을 배경으로 한다. 사위어가는 6월항쟁의 민주주의 불꽃을 다시 피워올리겠다는 그들의 투쟁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죽음과 분신으로 이어졌다. 20주기를 맞아 ‘강경대 열사’ 추모사업이 오는 23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를 시작으로 계속된다고 한다. 전남대 ‘박승희 열사’ 추모제와 성균관대 ‘김귀정 열사’ 추모 평화콘서트 등도 계획돼 있다고 한다.
갑자기 김귀정이 김소진을 불러냈다. 수습기자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91년의 김소진은 김귀정의 영안실 주변을 유령처럼 어슬렁거렸다. 교열기자인 그가 왜 영안실 주변을 맴돈 것일까. 나중에 나온 소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짐작할 뿐이다.
김귀정의 주검이 안치된 서울 명동 백병원에서는 경찰과 시민대책위가 부검 공방을 벌였다. 대책위 주변에는 끼니를 해결하려는 도시빈민 혹은 부랑자들인 ‘밥풀떼기’들이 어슬렁거렸다. 밥풀떼기들은 과격한 행동으로 대책위를 곤경에 빠뜨렸다. 김소진은 그해 여름 문예지에 발표한 소설에서 대책위를 ‘열린 사회’로 밥풀떼기는 ‘그 적들’로 표현했다.
실제로 김소진은 ‘열린 사회를 만들겠다는 대책위와 학생들이 밥풀떼기를 어둠의 세력으로 보고 배척하는 90년대 초 닫힌 현실을 잘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김소진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 김보근한테 김소진이 소설을 구상할 때의 상황을 물었다. 그는 “소진씨는 영안실 주변을 직접 취재했다”며 “소설의 치밀한 세부묘사가 바로 그 증거”라고 했다.
91년 죽음의 행렬이 20년이 지난 2011년에도 이어진다. 91년 김귀정과 김소진이 함께했던 영안실에 2011년에는 노동자들의 주검이 줄을 잇는다. 쌍용자동차 구조조정이 시작된 이래 자살하거나 심근경색으로 숨진 노동자나 가족이 13명에 이르고, 최근 1년간 자살률은 일반인의 3.74배나 된다고 한다. 더구나 파업 당시 56%이던 우울증이 지금은 80%대까지 늘었다고 한다. 서른넷에 요절한 김소진이 살아있다면 마흔여덟이다. 91년 그때처럼 영안실 주변을 서성이며 죽음을 취재하러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을 잃은 한국 문학의 중견작가로서 또다른 죽음의 시대에 맞서 ‘문제작’을 내놓지 않았을까. 김지하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목련이 피면, 그가 그립다. dust@hani.co.kr 손준현 에디터부문장
91년 죽음의 행렬이 20년이 지난 2011년에도 이어진다. 91년 김귀정과 김소진이 함께했던 영안실에 2011년에는 노동자들의 주검이 줄을 잇는다. 쌍용자동차 구조조정이 시작된 이래 자살하거나 심근경색으로 숨진 노동자나 가족이 13명에 이르고, 최근 1년간 자살률은 일반인의 3.74배나 된다고 한다. 더구나 파업 당시 56%이던 우울증이 지금은 80%대까지 늘었다고 한다. 서른넷에 요절한 김소진이 살아있다면 마흔여덟이다. 91년 그때처럼 영안실 주변을 서성이며 죽음을 취재하러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을 잃은 한국 문학의 중견작가로서 또다른 죽음의 시대에 맞서 ‘문제작’을 내놓지 않았을까. 김지하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목련이 피면, 그가 그립다. dust@hani.co.kr 손준현 에디터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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