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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특급’은 우리나라가 창피하다 / 성기지

등록 2011-04-14 19:47수정 2011-04-14 19:49

성기지 한글학회 연구원
성기지 한글학회 연구원
한글을 내쫓은 우리나라 ‘특급 대학’과 한복을 내쫓은 우리나라 ‘특급 호텔’이 요 며칠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의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울특별시의 중심을 자처하는 ‘특별 구청’에서도 어린이 영어 도서관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대학은 왜 우리말로 학문을 하면 창피한 걸까? 대학은 왜 영어로 학문을 해야 특급이 되는 걸까? 언어는 소통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산더미 같은 지식을 앞에 두고 다만 남의 말을 배워야 하는 일에 온힘을 다 써야 하니, 그 남의 말을 자기 말로 부려 쓰는 사람들의 학문에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말이 창피한 특급 대학에서 남의 말로 학문을 해야 하는 꽃다운 젊음들의 그 고통과 좌절의 나날들이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복과 트레이닝복을 입으면 왜 호텔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걸까? 호텔은 왜 양복을 입은 손님만 받아야 특급이 되는 걸까? 옷은 그 민족의 문화 소산일 뿐, 그 자체가 손님의 품격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왜 서양 옷은 고급이고 우리 옷은 저급인가? 한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옷이란다. 특급 호텔 뷔페가 출근길 찻간처럼 붐비지 않는 한, 남의 발에 밟힐 만큼 한복 치맛자락이 그토록 긴 것도 아니다. 한복과 트레이닝복이 함께 금지된 옷으로 묶인 것은 누가 보더라도 특정 옷에 대한 경멸과 혐오에서 비롯된 조치이다.

우리나라 ‘특급’은 한결같이 서양 문화를 붙좇는다.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야 백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의 말과 서양 사람이 입는 옷 따위를 특급의 최대 가치로 여기는 못난 짓은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 이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오래 묵은 사대주의의 병폐일 뿐이다. 이래서는 우리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 문화의 발전이 따르지 않는 국력 신장은 모래 위의 집처럼 불안하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말과 한글이 세계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한시라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 손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우리 문화를 지키고 펼쳐 나가는 데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 문화는 곧 그네들의 사업 자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보도를 보니, 서울 종로구청이 관내에 어린이 영어 도서관을 건립한다고 한다. 종로구는 우리 궁궐들이 모여 있는 국토의 심장부이며, 세종대왕이 나신 곳을 비롯하여 주시경 선생 집터, 한글회관, 조선어학회 유적 등을 안고 있는, 우리 말글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얼마 전 서울시는 종로구 일대에 ‘한글 마루지’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어린이 영어 도서관 건립 소식은 우리를 아연하게 한다. 게다가 어린이 영어 도서관을 세우겠다는 자리는 세종대왕 나신 곳으로부터 겨우 100m 남짓 떨어진 곳이다. 그래서 영어 도서관 이름에 ‘세종마을’을 붙인다고 하니, 마치 얼빠진 희극배우들이 펼치는 한편의 슬픈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한글 마루지’에서조차 우리 아이들이 한글 도서관 대신 영어 도서관에 가야 하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제 분별없는 행정과 무한경쟁의 뒤안길에 뒹구는 우리 전통문화는 누가 돌볼 것인가? 우리의 새로운 문화는 누가 어떻게 창조해 나갈 것인가?

대학은 학문을 갈고닦는 일에 소홀함이 없되, 단지 외국어를 익히는 일에 정력을 낭비하는 잘못이 없기를 바란다. 또 호텔은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야 할 것이다. 더욱이 관내에 훌륭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특급 구청’이 본분을 잃고 영어 숭배에 앞장서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특급’이 우리나라가 창피해서야 되겠는가?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은 우리 말글을, 우리 문화를 당당하게 뽐내고 지켜가는 대학과 기업 및 지방자치단체를 ‘특급’으로 여기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기지 한글학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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