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한 한복 디자이너가 서울 신라호텔 뷔페식당에서 식사하려다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해 화제다. 한복은 ‘위험’한 복장이라는 게 호텔 쪽의 설명이었다. 그동안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인해 다른 손님들이 옷에 걸려 넘어지거나 한복이 다른 손님에게 밟히는 등 불만사항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처였단다. 이 일이 트위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호텔 사장이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 사과했고 임직원 일동 명의의 사과문도 배포되었다. 또 국회에선 주무부처인지도 모호한 장관까지 나서서 호텔을 엄중 조처하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트위터와 인터넷에서는 우리 전통을 무시한 처사를 비판하는 의견과 패러디가 여전하다.
그런데 이번 논란을 보면서 찜찜한 건, 한복과 함께 불량 복장으로 지목된 ‘트레이닝복’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가 없다는 점이다. 애초 해명 과정에서 신라호텔이 드레스코드 위반이라고 규정한 건 한복과 함께 트레이닝복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특급호텔의 한복 홀대만으로 보기에는 뭔가 시원치 않다. 우리 것, 우리 전통에 대한 폄하만으로는 그 호텔이 지켜왔던 ‘물 관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트레이닝복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읽어야만 여기서 한복이 의미하는 바도 더 분명해질 수 있다.
호텔이 내세운 원칙에 따르면, 트레이닝복(사실 ‘추리닝’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지 모른다)과 호텔식당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소속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식당에 오는 사람은 특급호텔이 관리하는 고객의 테두리 안에 들지 않는 부류라고 규정한 것이다. 끊임없이 차이와 구별을 통해 자신들만의 ‘성’을 쌓으려는 이들이 쳐놓은 장벽이다. 그래서 트레이닝복이 상징하는 건 호텔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 아니라 호텔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한복의 의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 드레스코드 속 한복은 우리의 전통의상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을 구분하는 데 활용되는 상징으로서의 한복이다.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의 부류를 규정한 것이다. 호텔 뷔페식당의 ‘드레스코드’에서 ‘계급코드’가 읽힌다. 보도에 따르면, 처음에 이 손님이 도착했을 때 입장 허용 여부를 두고 호텔 직원들이 머뭇거렸다는데, 그건 그들 머릿속 한복은 그런 고급 디자이너의 한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사건의 현장이었던 그 식당에서 성인이 저녁식사를 하려면 6만9000원에 봉사료와 세금이 10%씩 붙어 총 8만원을 훌쩍 넘는 값을 치러야 한다. 이미 입장이 허용된 이들은 꽤 제한적이다. 사실 여기에 특정 복장을 차단하는 정책을 만들어놓은 건 정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예방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수는 그 정책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던 호텔 직원들의 순진함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람에 따라서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따로 정해져 있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건 유쾌하지 않다. 더구나 갈수록 구분이 명확해질 뿐 아니라, 그 경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도 문제삼지 않는 사회가 된다는 건 무섭기까지 하다.
하긴 이번 일이 이렇게 논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애초에 입장을 거부당한 이가 삼성가의 한복을 디자인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디자이너였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혹시 큰맘 먹고 대접하겠다는 자식의 손에 이끌려 왔던 촌로의 낡은 한복에 대한 문전박대는 얼마나 되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트레이닝복도 트레이닝복 나름일지 모른다. <시크릿 가든> 김주원의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명품 트레이닝복”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싱거운 상상을 해본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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