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지난 주말 모처럼 훈훈한 소식이 전해졌다. 가수 조용필씨가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단독으로 위문공연을 하고 1년 전에 한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지난해 어린이날 영국 필하모닉 공연 때 동행했을 때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어기지 않은 것이다. 한 부문에서 대가를 이룬 사람은 역시 뭐가 다르다는 것을 절감한다.
소록도 주민들이 모처럼 환희의 도가니에 빠졌음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개운해진다. 82살의 한 할머니는 손가락 등 몸의 일부가 마비되고 시력을 잃은 상태지만, 휠체어에 앉아서 어깨춤을 추었다. 71년간 병원에 있었다고 하니 일제 식민통치 말기인 1940년 무렵 수용된 것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사는 총독부가 1916년 설립한 소록도자혜의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록도는 일제가 행한 한센인 강제격리정책의 산물이다. 일본은 1907년 나병예방법을 제정해 발병한 환자를 ‘요양소’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름만 요양소지 감옥과 다름없었다. 수용된 환자는 강제사역을 해야 했고 규율을 어기면 징벌방에 수감됐다. 악명 높은 일본의 한센인 강제격리정책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일부 완화되기는 했지만, 기본틀은 1996년까지 지속됐다.
한센병은 흔히 가난한 사람들의 병이라고 한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가 되면 발병을 한다. 병을 일으키는 균도 결핵균과 비슷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노동을 하거나 군대에 들어간 조선인들 가운데 환자들이 많이 나왔다. 조선인의 발병 비율은 일본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일본 법무연수소가 낸 <재일조선인 처우의 추이와 현상>을 보면 1955년 3월 말 시점에서 등록 재일동포 가운데 한센병 요양소 입원자의 비율은 0.11%였다. 반면 일본인 수감자의 비율은 인구 대비 0.011%였다. 대략 10배의 차이가 난다. 이 자료는 1949년 5월 시점에서 한국인 추정환자를 전체 인구의 2.1%로 산정했다. 단순비교하면 한국의 환자 발생 비율이 일본의 191배에 이르는 것이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 해방 후의 혼란, 독립국가의 체제 미정비 등을 고려해도 너무나 많다.
일제 때 소록도의 수용실태는 일본 내 요양소보다 더 가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수감된 조선인들도 각박하고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환자보다 처우가 더 혹독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는 민족 차별, 한센인 차별, 여성 차별 등 삼중고에 시달렸다. 1924년 경북에서 태어난 안술임의 일생은 인간의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긴 전형적 사례로 지적된다. 그는 오사카에서 병에 걸려 17살 때 요양소에 강제수용됐다. 요양소에서 만난 남자와 평생을 같이하기로 하고 결혼을 했다. 수용소 당국은 환자끼리의 결혼은 허용했지만 남자는 불임수술을 받게 하고 여자가 임신하면 강제 낙태를 시켰다. 안술임은 때가 되면 탈출할 각오로 임신을 했다. 그러나 남편이 요양소에서 권하는 시약을 먹다가 부작용으로 몸이 망가져 탈주 계획이 좌절됐다. 간호사들은 인공유산을 시킨 뒤 영아를 잠깐 보여주고 그대로 생명을 끊었다. 간호사들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내애를 엎드려 죽이기 전에 한 말은 “이제 봤으니 됐지요”였다.
일본 내 요양소에 있는 재일동포 생존자들은 저마다 이런 한 맺힌 사연을 갖고 있다. 이들을 이따금 찾아가 위문공연을 하고 그 처절했던 시절의 얘기를 듣는 동포학생들이 있다. 조선학교 학생들이다.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의 요양소에 있는 박수련이란 80대 후반의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소학교 학생들이 우리말로 쓴 연하장을 받고서 “아직 잊혀지지 않은 거지, 너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조선학교가 지난 대지진 때 입은 피해로 위기에 몰려 있다고 한다. 이런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 생생한 증언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배움의 터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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