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다시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걷고 또 걷고 밤이면 침낭 속에서 추워, 추워 하며 웅크리고 자던 4년 전 안나푸르나의 기억이 몸살나게 그리워서다. 하루 세끼 밥 걱정, 각종 공과금 날짜도 잊고 휴대전화와 텔레비전, 인터넷과도 작별하고 시간을 잊고 시간에서 놓여난 열흘은 그것 자체가 위안이다.
대신 히말라야에선 영원 혹은 영원의 부재를 생각하게 된다. 인류,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와 마주한다. 아마도 해와 달, 별, 설산, 바람, 하늘, 숲 등 모든 자연이 너무 강렬해서 아무런 매개물 없이 날것으로 직거래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내가, 인류가 사라진다 해도 그것들은 그전처럼 그대로 거기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문득문득 마음을 아득하게 만든다.
한국인의 식습관은 정말 독특하다. 세계 각국의 트레킹팀들 가운데 요리사팀을 대동한 것은 한국팀들뿐이다. 현지에서 채용된 네팔인들은 북엇국도 비빔국수도 김치찌개도 된장찌개도 잘 끓이고 오이나물도 무나물도 맛있게 무쳤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나물·국·김치·밥을 먹으면서, 더러는 등반길에 봐둔 토종닭 혹은 염소가 탕으로 백숙으로 볶음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한국 요리가 조리 과정에서도, 또 식사 뒤에도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양산해내는지 알 수 있었다. 시원한 국물, 아니 뜨거운 국물이 없으면 밥을 먹은 것 같지 않다는 식습관이 음식쓰레기를 양산하고 그것들은 모두 히말라야 땅에 버려졌다.
적게 먹고 적게 싸자, 적게 쓰고 적게 버리자는 결심과 함께 지구별의 가장 큰 재앙은 인간이라는, 이렇게 먹고 소비하고 쓰다가는 인류만 아니고 다른 종까지 인간이 모두 멸절시켜버릴 것이라는 새삼스런 자각도 했다. 전기가 귀한 그곳에서 유일하게 밤새 불이 켜진 곳은 양계장이고, 밥상에 오른 것은 실은 토종닭이 아니라 양계장 닭이었음도 알았다.
돌아온 다음날 후배가 재미있다고 들고 온 책이 하필이면 김남일의 <천재토끼 차상문>이었다. 첫 줄에서 마지막까지 네팔에서 느꼈던 나의 온갖 상념들을 구체화시킨 것 같은 작품이었다. 작가는 ‘유나바머 사건’을 접하고 소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유나바머 사건은 하버드대 출신의 천재 수학자, 버클리대의 최연소 종신교수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가 스물셋에 미국 몬태나주의 깊은 숲속으로 잠적하여 홀로 인류의 산업문명 전체를 상대로 전개한 전쟁을 말한다. 그의 우편물 테러로 17년 동안 3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상해를 입었고 그는 종신형으로 복역중이다. 작가는 테러 대신 토끼를 선택했다. 인류의 진화를 바라면서 땅이 놀랄까봐 사뿐사뿐 뛰어다니는 초식동물 토끼류를 인류처럼 진화된 영장류로 설정했다. 나도 작가처럼 카진스키의 테러 같은 극단주의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과학기술의 무진장한 지속적인 질주가 철학적·인간적 반성 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결국은 인류를, 지구의 전 생명체를 멸절로 이끌 것이라는 ‘유나바머 선언’에는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거나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에 대입해 보면 인류는 절대로 강한 자가 될 수도, 살아남는 자가 될 수도 없다. 어떤 시대에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비쳐도 세월이 지나면 그 극단적인 주장이 상식이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많이 보아왔다. 노예해방, 여성해방 등도 당시에는 극단적인 주장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상식이 되었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 수밖에 없지만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유나바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반성과 철학 없는 과학기술과 무한정 소비되는 에너지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는 세상이 언젠가는 오리라고 낙관적으로 희망해본다.
우리 모두 ‘천재토끼 차상문’처럼 진화했으면…. 그것이 인류의 진정한 진화이고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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