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경제·국제 에디터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외침이
사회적 연대로 발전하는 와중에
펜디 패션쇼가 열린 건 역설이다
사회적 연대로 발전하는 와중에
펜디 패션쇼가 열린 건 역설이다
2007년 겨울 중국 베이징에서 특파원으로 일할 때였다. 만리장성에서 열렸다는 패션쇼 장면이 텔레비전에서 자꾸 흘러나왔다. 투입된 모델만 88명에 이르는 초대형 행사였다는 설명도 따라붙었다. 올림픽이 다음해 베이징에서 열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그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모델들은 만리장성 계단을 오르내리며 화려한 옷맵시를 뽐냈다. 행사장에는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펜디의 만리장성 쇼는 그토록 휘황찬란했다.
나중에 들으니 펜디의 패션쇼는 그 자체가 명품이었다. 장소를 선정하고, 모델을 고르고, 참석자를 초청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장인이 웨딩드레스를 만들듯 한땀 한땀 이뤄진다고 했다. 펜디가 크리스티앙 디오르, 지방시, 겔랑 등 60여개 브랜드를 거느린 명품 제국 ‘루이뷔통 모에헤네시’ 그룹의 일원이라는 데서도 그 정교함을 짐작할 수 있다.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는 패션쇼가 끝난 뒤 한 인터뷰에서 “다음에는 달에서 패션쇼를 해볼까요?”라며 위세를 떨었다.
그 패션쇼가 그로부터 4년 뒤 서울에서 열렸다. 펜디가 찾아낸 달은 한강에 뜬 세빛둥둥섬이었던 것일까. 한강 쇼의 화려함도 만리장성 쇼에 못지않았다. 한강 쇼만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컬렉션과 지갑, 구두, 액세서리, 시계, 선글라스가 선보였다. 무대에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선택된 최정상급 모델 50여명이 도열했다. 쇼가 끝난 뒤에는 밤늦게까지 성대한 파티가 이어졌다. 온라인을 통해 생중계된 이 패션쇼는 무려 10만명이 지켜봤다고 한다.
중국과 한국에서 열린 패션쇼의 차이는 행사장 밖에서 나타났다. 펜디 패션쇼가 열리는 동안 행사장 밖에선 “아름다운 한강을 동물의 피로 뒤덮지 말라”는 동물애호단체 회원들의 시위가 펼쳐졌다. 펜디 패션쇼의 핵심이 모피라는 것을 드러내는 구호였다. 사실 모피를 떼고선 펜디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펜디가 1910년대 이탈리아 로마에서 처음 문을 열었을 때도 주품목은 모피였고, 1930년대와 1940년대 유럽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성장한 힘도 모피에서 나왔다. 펜디는 이번 한강 쇼에서도 여우·친칠라·족제비 모피로 만든 아이템을 소개했다.
펜디 패션쇼가 반값 등록금을 외치는 학생들의 외침이 사회적 연대로 발전하는 와중에 벌어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부자의 특권을 상징하는 명품과 생활의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10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 부담과 실업의 공포, 커피 한 잔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저임금과 가계부채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명품의 유혹은 실제로 절망일 것이다.
펜디가 한국을 찾은 데는 다 까닭이 있다. 유럽과 미국에선 1980~90년대 모피 거부가 시민운동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모피를 입지 않는다”라는 말은 채식주의자나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선언이었다. 세계적인 모델 나오미 캠벨은 펜디의 패션쇼에 모피코트를 입고 섰다가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자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펜디의 매출은 해마다 두자릿수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고, 그 가운데 모피 매출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국에서 펜디를 비롯한 명품시장은 삼성, 신세계, 롯데 같은 재벌가의 딸들이 주도한다. 백화점이나 면세점, 패션업체를 물려받은 이들 후계자는 자신이 속한 가문의 위세와 명망, 그리고 돈벌이를 위해 명품시장을 키우고 있다. 인천공항 면세점에선 루이뷔통을 들이기 위한 신라와 롯데의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펜디 패션쇼가 비록 인공일망정 섬에서 열렸다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 우리 사회의 평균과 유리돼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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