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현 에디터부문장
4년 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때
뼈가 깎이고 살점이 찢어지고도
살아남은 상괭이가 괴물이 된다면
뼈가 깎이고 살점이 찢어지고도
살아남은 상괭이가 괴물이 된다면
#심연의 탄생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글귀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어비스>에서 인용되면서 꽤 유명해졌다. 하지만 원래 문장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이다. 괴물과 심연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
이 글귀는 많은 해석을 낳았다. 먼저 민주화운동 세력. 무자비한 독재세력과 싸우다 보니 그 ‘투사’도 어느새 괴물이 됐다는 것이다. 복수나 출세를 꿈꾸는 사람들도 괴물이 되기 쉽다. 갖은 수단을 동원해 마침내 목적을 이룬 뒤, 이미 괴물이 된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경우도 문학적 소재로 즐겨 쓰인다.
하지만 이 경우 ‘괴물’은 설명하지만 ‘심연’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해석을 보자. 자기 내부에 심연이 있고 그곳에 괴물이 있다. 심연은 곧 괴물이며 자신이다. 그 괴물을 이겨낼 때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괴물에게 질 때 곧 인간의 자격을 잃는다. 니체의 말을 자의적으로 바꿔본다. “그대가 마음속 심연=괴물을 들여다볼 때, 심연=괴물도 그대를 들여다본다. 그대는 그 마음속 괴물에게 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괴물의 탄생
괴물은 바다에서 태어난다. 인간이 양수의 바다에서 자라 자궁 밖으로 나오듯, 바다의 심연에서 자란 괴물은 때가 되면 뭍으로 올라온다. 괴물들은 특히 한여름에 인간을 습격한다.
납량특선 괴물영화들이 그렇다. 2011년 여름 개봉을 앞둔 한국 영화 <7광구>에도 바다 괴물이 나온다. 제주도 남쪽 대륙붕 7광구에 떠 있는 석유시추선. 갑자기 나타난 심해 괴물과의 사투는 결국 인간 욕망과의 사투다. 2006년 여름에는 한강 둔치에 <괴물>이 나타났다. 봉준호 감독의 이 영화는 미군의 독극물 한강 방류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
열대야가 잦다. 애써 잠을 청해보지만 뒤척이다 30분 만에 다시 일어나 톡, 톡, 톡, 자판을 두드린다. 그러다 납량특선 블록버스터 괴물영화 한편을 마음속으로 찍는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삼성중공업의 크레인 적재선과 유조선이 충돌해 대규모 기름유출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비비케이(BBK) 실소유주 의혹, 위장전입 사실 등이 제기되면서 곤경에 처했지만, 태안반도를 뒤덮은 기름띠에 대한 보도가 넘쳐나면서 그 의혹을 덮었다. 그때 돌고래의 일종인 상괭이들의 주검이 기름띠를 두른 채 바닷가로 밀려왔었다.
2011년 7월 태안 앞바다에 ‘괴물’이 나타났다. 강호동 다섯을 합친 500킬로그램이 넘는 초대형 가오리. 일각에선 태안 기름유출 사건과 관련이 클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지만, 사람들은 ‘설마’ 했다. 여기까지는 사실. 지금부터는 가상이다.
2012년 7월 한강 인공섬 세빛둥둥섬에서 괴생명체가 출현했다. 4년여 전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때 뼈가 깎이고 살점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은 상괭이가 괴물이 됐다. 괴물 출몰 장면 사이사이에 한 대통령 후보의 연설 장면이 나온다. 기름유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재벌 총수도 등장한다. 몽타주 기법이다. 일단 여기까지.
괴물들은 도처에 있다. 제주와 인천 송도 앞바다에 ‘영리병원’이 수면 아래에서 꿈틀댄다. 건강보험마저 망가뜨리려는 정부와 영리병원을 운영하겠다는 재벌. 바닷속 심연에서 괴물이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있다.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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