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요즘 숨가쁘게 돌아가는 한국 진보정치의 상황을 보노라면 순간순간 희비가 교차한다. 비록 극히 작은 표 차이였지만, 민주노동당 대의원들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계획을 끝내 부결시킨 것은 분명히 일대 경사였다. 전혀 성향이 다르고 노동자 등 소외된 계층들을 대표하지도 않고 대표할 수도 없는 국민참여당과의 정치공학적 통합은 민주노동당의 ‘진보정당’으로서의 자격을 소멸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한데, 동시에 민주노동당과의 통합 문제를 놓고 진보신당은 심각한 분열을 겪는 것 같아, 매우 아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어떤 다른 정당도 대신 맡을 수 없는 그 사명을 전혀 다하지 못하고, 제대로 실행하기 시작하지도 않은 채 진보신당의 역량이 분열로 감소되어 버리면 한국 진보정치의 역사상 하나의 후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만이 다할 수 있는 그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아주 단순화시키면 두 가지라고 본다. 첫째 여태까지 ‘국민’만 알고 있어온 한국 정치판에 ‘계급’을 도입해 ‘국민의 정당’이 아닌 ‘계급의 정당’으로서 기능하는 것이고, 둘째 ‘국민’의 벽을 넘어서 ‘국제적인 계급적 연대’에 나서는 것이다. 두 개의 사명은 다 ‘국민’이라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가장 억압적인 개념을 전복하고 초월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첫째 사명은 ‘국민’을 안에서 전복하는 것이고, 둘째 사명은 ‘국민’을 대외적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일반 부르주아 정당들이 ‘국민 모두를 위한 성장’ 등을 이야기한다면 계급정당은 소수의 착취자들에게 꽤나 불리할 수도 있는 ‘다수를 위한 공정한 재분배’를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서 마피아를 뺨치는 수준의 족벌경영과 비리, 전횡 등으로 악명이 높은 사립대학들을 점차적으로 공립화시키는 것은 다수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축복이 되겠지만, 재단 관계자나 그 재단과 유착된 일부 귀족화된 전임교원들의 권력과 권위를 박탈할 것이다. 대기업의 경우 10%에 불과한 실효 법인세율을 일본 정도(39.5%)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독일 정도(30~33%)로 높여 이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대학 등록금을 무상화시키면 다수의 대학생들은 크게 득을 보겠지만, 10억원 이상의 주식 등 금융자산을 보유하는 부자 13만명은 크게 손실을 볼 것이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어 학업을 포기하는 대학생들도, 해마다 배당성향을 계속 늘리는 재벌 대주주들도 다 ‘국민’이지만, 계급정당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국민 단결’을 설교하지 않고 후자에 대한 전자의 투쟁을 선도하는 것이다. 기업 세율 인하 등의 방법으로 지배자들이 여태까지 가난뱅이들을 상대로 계속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을 벌여도,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에 공개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반공주의 신드롬이 강한 국내 정치판에서 아직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계급정당 말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국의 부유층이 과연 한국인만을 착취하는가? 가까운 중국만 해도 진출중인 한국 기업들이 5만여개쯤 된다. 대부분이 저임금 노동력을 겨냥하는 노동집약적 제조업이고, 그 관습적인 임금 체불, 잔업 강요, 부당해고 등에 대한 중국 노동자들의 저항은 이미 거의 15년 넘게 이어져 왔다. 한국 자본주의의 해외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장차 동아시아 노동자 전체의 반자본주의적 단결을 다질 수 있는 국내 정치세력 역시 계급정당 이외에 없을 것이다.
거의 90%의 노동자들이 조직돼 있지 않고, 조직 노동자마저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계급’보다 ‘국민’, ‘회사’, ‘지역’에 대한 소속을 더 강하게 인식하는 풍토에서는 계급정당을 꾸려나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계급정당을 운영하기가 아주 어려운 토양인 만큼 진보신당과 같이 유일하게 계급정당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을 아끼고 살리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다소 타협적이고 주류 지향적인 경향에 끌려다니지 않을 만큼 진보신당이 몸집을 키우게 되면 민주노동당과의 연합전선을 펴도 좋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계급정당으로서의 진보신당의 독자적 존재가 귀중한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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