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국제부장
‘시스템에서 걸어나간 이들’은
월가뿐 아니라 스페인·인도에서…
한국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들이
월가뿐 아니라 스페인·인도에서…
한국에서도 심상치 않은 일들이
며칠 전 유튜브를 보다가 혼자 뒤집어졌다. 무명의 트레이더, 알레시오 라스타니를 최근 전세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만든 지난주 영국 <비비시>(BBC)의 뉴스 영상이다.
화상 연결된 생방송에서 유로존 국가들이 새롭게 마련하고 있는 6주간의 부채위기안의 전망을 묻는 앵커에게 그는 말한다. “수백만명의 저축이 사라져버릴 거다. 경제위기란 암과 같다. 지나가겠지 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암이 더 커지듯 너무 늦어버린다.” 당황하는 앵커에게 그는 “고백할 게 있다. 난 매일 밤 잠자리에서 또다른 경기침체를 꿈꾼다 … 대부분의 트레이더들은 경제를 어떻게 고칠지 별로 상관 안 한다. 우리의 일은 거기(위기)서 돈을 버는 것뿐이다”라고 말을 잇더니 마침내 결정타를 날린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정부가 아니다. 골드만 삭스다.”
이 인터뷰는 ‘골드만 삭스가 세계를 움직인다’(Goldman Sachs runs the world)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퍼져나가며 <비비시>가 ‘낚였다’는 논란까지 일으켰다. 일부에선 그가 사이코패스거나 기업들을 망신주는 조직 ‘예스맨 프로젝트’의 일원이라는 추측도 내놨지만, 그는 세계 금융의 또다른 중심 런던에서 활동하는 독립 트레이더인 것으로 드러났다. <포브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라스타니는 자신의 발언 중 ‘골드만 삭스’는 바로 ‘돈’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한 트레이더의 돌발성 발언이라고? 눈을 돌려 미국을 보자. 소수의 젊은 실업자들 중심이었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은 이제 2주를 넘기고 있다. 지난달 30일엔 뉴욕경찰 본부 앞까지 2000~3000명이 행진을 했다. 보스턴에선 1일 미국 최대 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 앞에 3000여명이 모였고,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워싱턴 등지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고 ‘n+1’사이트는 전한다.
사실 이들은 별달리 지도부도, 강령도 없다. 10여명씩 둘러앉아 토론을 하다가 가끔 옆 조의 탬버린 소리에 이야기를 멈추기도 하는 식이다. 일부 시위대가 작성한 10가지 요구사항도 ‘대기업의 정치권 돈주기를 무제한 허용한 연방법원 판결을 폐지하라’부터 ‘독감 시즌이 오니 유급 병가를 보장하라’ ‘100% 취업을 보장하라’에 이르기까지 그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가디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인터넷을 통해 정서를 공유하고 움직이는 이들에 대해 ‘해시태그(#) 액티비즘의 도래’라 부르면서도 장난이나 소풍 같다는 지적 또한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사연은 구체적이다. 이 시위를 처음 제안한 이들이 만든 ‘우리는 99%다’ 블로그에는 미국 전역에서 자신의 사연을 손으로 써서 올린 인증샷이 이어지고 있다. 학자금 빚에 허덕이는 석사학위를 가진 여성은 “많이 노력하면 뭐든지 될 수 있다지만 많이 돈을 내면 뭐든지 될 수 있을 뿐… 나는 99%다”라는 사연을 올렸다.
<뉴욕 타임스>는 이들을 ‘시스템에서 걸어나간 이들’이라 일컬으며, 기성 시스템을 부정하고 투표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최초의 세대가 월가뿐 아니라 지금 스페인, 인도, 이스라엘의 시위에서 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저명한 미국의 좌파 잡지 <디센트>의 편집인 마이클 케이진 조지타운대 교수는 이것이 좌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한국 사회도 이런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안철수 현상, 한진중공업·대학등록금 이슈 등엔 ‘인간다운 삶’의 최소한의 조건마저 박탈당한 데 대한 공분과 기존 정치권에 대한 절망감이 깔려 있다. 단 한국이 한가지 다르다면, 그 정치시스템을 바꿔보겠다고 시스템 밖 사람들이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는 그 한 예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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