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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점령’이 끝나갈 때 / 김영희

등록 2011-11-06 19:17

김영희 국제부장
김영희 국제부장
시위대의 물리적 점령은 끝나가도
심리적 점령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기득권자들이 안간힘을 쏟더라도
‘월가 점령’ 시위대들에게 축하를! 지난 4일 미국 뉴욕 리버티플라자(주코티) 공원엔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붙었다고 미국 언론들이 일제히 전했다. ‘화장실 설치.’

두 블록 떨어진 건물(공원 안 설치는 불허됐다)에, 24시간 안전이 보장되고 매일 관리가 되는 화장실 세 칸이 마련되며, 공원 안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는 사람이 늘어 비난을 받던 시위대들은 큰 골칫거리 하나를 덜었다. 이는 7주를 넘어선 월가 노숙시위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그나마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 폭설 등 강추위에 시위와 무관한 사람들의 도난과 성추행 사건까지, 장기 시위의 부작용은 끊이지 않는다. 겉보기엔 이럭저럭 꾸려가는 듯하지만 동력이 떨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점령의 끝’은 예고돼 있다.

리버티플라자의 점령이 끝나는 순간 ‘명확한 목표도 조직도 리더도 없던 저항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는 식의 진단이 쏟아질 것이다. 좀더 ‘친절한’ 보수라면 이 정도는 얘기할 것이다. ‘이만하면 너희 불만은 충분히 알았다. 이제 전문가들에게 맡겨라!’

보수적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자신의 사이트에 실은 ‘예스, 월가는 빈민을 돕는다’는 글이 대표적이다. 그의 현실 진단은 점령시위대의 인식과 그리 다르지 않다. 퍼거슨은 “소득 하위 20% 계층에서 태어난 아이가 상위 10%에 오를 확률은 20명 중 1명꼴인 반면, 상위 20%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확률은 40%”라며,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계층이동이 어려운 나라가 됐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해법은 정반대다. 계층이동을 원활히 할 핵심인 공공교육을 교사노조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자선 등을 통해 별도의 차터학교를 활성화함으로써 빈민가 교육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아메리칸드림의 핵심은 “강요된 평등이 아니라 계층이동이며, 공공의 독점이 아니라 경쟁이며, 세금·몰수가 아니라 자선·박애”다.

그렇다면 ‘99%’가 처음으로 주체가 돼 일어섰던 ‘미국의 가을’은 실패로 귀결될 것인가? 답은 ‘아니오’다. 월가 점령 시위는 이미 미국 사회를 ‘돌이키기 힘들고, 장기적이며,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밀어넣었다. 물리적 점령이 끝나가지만 심리적 점령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기득권자들이 그 변화를 가로채려고, 외면하려고 안간힘을 쏟더라도.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는 널려 있다. 지난달 말 미국 의회 예산국은 1979~2007년 미국의 상위 1% 계층의 소득이 275% 늘어난 데 비해 하위 20%는 불과 18% 늘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런 보고서가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례적인 것은 이 보고서가 미국 주요 신문들의 1면을 ‘점령’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미국의 대중들이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소득·부·정치권력의 집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분배의 불평등을 지적한 응답자의 비율은 50~60%대에 이른다. 부의 불평등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계급투쟁’이라는 딱지가 붙던 불과 얼마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수치다.

1955년 로자 파크스의 용기있는 행동은 흑백 좌석을 분리한 버스의 탑승 거부 운동으로 이어져 흑인 민권운동을 불타오르게 했다. 거기에는 엘라 베이커나 베이어드 러스틴 같은 멘토세대의 역할이 컸다. 이들이 1940년대 말 백인 좌석에 일부러 앉아 잡혀가며 벌인 시위는 대중적 호응을 끌어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 경험이 결정적 시기가 왔을 때 이들을 핵심 활동가로 우뚝 서게 했다. ‘점령 시위’는 파크스는 아니더라도 베이커와 러스틴을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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