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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여는 도시, 개성

등록 2005-07-18 18:06수정 2005-07-18 18:07

유레카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임진나루 건너 장단을 지나 서쪽으로 40리 가면 개성부가 있다”고 쓰여 있다. 서울에서 아주 가깝다는 얘기다. 옛 이름은 청목령(靑木嶺)이다. 오늘날의 지명은 신라가 고구려한테 이 지역을 빼앗아 옛 행정구역을 송악군과 개성군으로 개편한 것이 뿌리다. 고려의 도읍지로서 개성은 가구 수가 10만~13만호에 이르렀다 한다. 한양이 가장 번창했던 1835년 4만5천여호의 갑절을 넘는다. 인구로 치면 얼추 70만이다. 국내상업의 중심지였고, 세계 각국의 상인이 대거 드나들던 국제무역도시이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자 개성의 운명도 기울었지만, 개성 사람들은 조정에 계속 까다롭게 굴었던 모양이다. 이들은 순대처럼 길쭉하게 말아 장구통 모양으로 자른 조랭이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는 이성계의 목을 자르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송도 쌍놈’들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가게(각)를 열었는데, 타산이 빠르고 인색하다는 뜻의 ‘깍쟁이’는 이 ‘각’에 ‘쟁이’가 붙은 말이란 설이 있다. 여인들도 채소 재배 농민에게 똥오줌을 팔 정도로 실속에 밝았다고, 북한 향토사학자 송경록은 <개성이야기>에 썼다.

광복과 함께 38선이 그어졌을 때 개성은 ‘이남’에 속했다. 전쟁이 터진 1950년 말 미군이 원자탄을 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의 70%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개성은 북한에서 이산가족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도 개성 남대문, 만월대, 선죽교, 표충비와 숭양서원, 고려 성균관, 공민왕릉 등 옛 고려유적들은 건재하다. 51년 7월부터 정전회담이 이곳에서 열리면서 비무장지대가 돼 폭격의 피해를 면한 덕분이다. 현대아산이 8월15일 개성 관광을 시작하기로 북쪽과 합의했다. 공단에 이어, 개성(開城)이 ‘여는 곳’이라는 이름값을 또한번 할 모양이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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