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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석구 칼럼] ‘독재자의 딸’과 꽃가마

등록 2011-12-12 19:23수정 2011-12-12 22:01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박근혜 의원이 어제 한나라당 의총에서 비상대책위원장에 추대됐다. 최대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이 수습의 큰 가닥은 잡은 셈이다. 한나라당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파산한 정당 하나를 리모델링하는 차원을 넘어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주류를 자처해온 보수세력을 대변한다는 보수정당이다. 사실 말이 보수정당이지 수구·극우적인 성향이 짙다. 한나라당은 이번 위기를 적당히 추슬러 화장만 바꾼 채 목숨을 연명할지 아니면 진정한 의미의 보수정당으로 다시 태어날지 갈림길에 서 있다. 한나라당이 이번 위기를 계기로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보수정당으로 거듭난다면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지형에 엄청난 회오리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박근혜 구세주론’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결국 박근혜 의원을 불러냈다. 박 의원이 전면에 나서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당내에 그만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 없고, ‘천막당사’를 통해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구해낸 경험도 있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천막당사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1 대 99의 사회로 상징되는 것처럼 우리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급변했고, 에스엔에스(SNS) 등 미디어 환경도 질적으로 바뀌었다. 문명사적인 대전환기에 들어섰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그렇고 그런 과거 인물 몇몇으로 지도부를 바꾼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더욱이 박근혜 의원이 누구인가.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권 18년 동안 민주주의를 짓밟고 독재정치를 자행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00개, 1000개의 형광등 아우라로 치장한다 해도 이런 역사적 사실이 감춰지진 않는다. 그런 독재자의 딸인 박 의원이 꽃가마를 타고 한나라당을 쇄신하겠다고 나선들 이에 감동할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나라당 안에는 훌륭한 인재들이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줄기차게 쇄신을 주장해온 정두언 의원을 비롯해 김성식, 유승민 의원 등은 자질과 능력, 그리고 이념적인 측면에서 진정한 보수적 가치의 대변자로 부족함이 없다. 한나라당이 내부의 안정을 넘어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려면 차라리 그런 이들로 지도부를 구성하라. 그런 정도의 파격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한나라당은 천막당사 아니라 풍찬노숙을 해도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기 어렵다.

정책적인 변화는 더욱 절실하다. 그동안 자칭 보수라는 세력이나 정당은 실제로는 수구 기득권 세력과 공생해왔다. 친일·독재의 향수를 되살리려는 수구세력의 움직임에 눈감고, 미국 일변도의 사대외교를 폄으로써 국가 정체성과 주체성을 뒤흔드는 데 일조했다. 북한과 극한 군사적 대치를 계속하며 동족 간의 갈등과 불화를 심화시키고, 강남 땅부자와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도 그로 인한 반사이익 챙기기에 안주했다. 이는 보수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한나라당이 이번에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려면 수구·극우 세력과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수구세력과 절연하는 결단과 진통 없이, 화합과 통합이 살길이라며 이들과 어깨동무하고 가려 한다면 기다리는 건 파멸뿐이다. 비록 내년 선거에서 지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 게 장기적으로 한나라당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쇄신파들의 향배도 관심거리다.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추구해온 쇄신파들의 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그들은 수구·우익 성향의 한나라당 본색은 바꾸지 못한 채 한나라당도 쇄신을 하고 있다는 생색내기용 들러리에 머물렀다. 한나라당이 최대 위기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쇄신파가 그들의 목소리를 관철할 절호의 기회다. 부디 성공하여 한나라당을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당으로 변화시키기 바란다.

만약 이번에도 쇄신에 실패한다면 더 이상 미련 두지 말고 한나라당을 떠나라. 헛심만 쓰는 모습을 계속해 보는 것도 이제는 안쓰러울 것 같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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