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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2012년, 다시 쓰는 정봉주 판결문 / 박용현

등록 2012-01-01 20:31수정 2012-01-01 23:33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무결점의 경력 내세우는 후보라면,
이를 공격하는 정적이나 언론에
‘파울!’이라고 외쳐선 안 된다”
 정봉주는 즉각 석방돼야 한다. 그리고 정봉주는 무죄다.

 두 명제를 굳이 나눈 것은 ‘석방’이 한겨울에 감옥에 던져진 정봉주 개인을 위해서나, 민주국가에서 제명될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품격을 위해서나 당장 필요한 조처이기 때문이다. 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 법원의 판결이 모두 옳다고 치자. 선거에서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는 단죄돼야 하며 비비케이와 관련한 정봉주의 주장이 모두 허위였다고 하더라도, 그를 감옥에 가두는 건 2010년대 국제사회에서 부끄러운 짓이다. 유엔을 비롯해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미주기구(OAS) 등은 거짓이든 참이든 말로써 다른 사람을 비방·비난했다는 이유로, 민사소송이라면 몰라도, 형사처벌을 당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용인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비방·비난의 대상이 대선 후보와 같은 공적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영국에 본부를 둔 표현의 자유 옹호단체 ‘제19조’(Article 19·세계인권선언 중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조항에서 이름을 따왔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유럽에서 한 사람이라도 이런 식의 형사처벌을 받은 나라는 러시아, 스페인, 폴란드, 벨로루스 등 네 나라뿐이다. 미주에서도 쿠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공화국, 브라질, 페루 등만 이 명단에 든다. 아프리카에서조차 20여개국이 ‘형사처벌 없는 나라’다. 5명 이상이 처벌된 것으로 확인된 나라는 이집트, 콩고민주공화국, 차드, 이란,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중국, 필리핀 등이고,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소말리아 등 정확한 정보 파악이 어려운 나라들이 이와 비슷한 상황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각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과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명단이다.

 유럽연합 의회는 2007년 결의문에서 “표현 행위 가운데 정작 형사처벌로 규제해야 할 것은 폭력의 선동이나 인종적 혐오 조장, 다원주의와 톨레랑스를 해치는 행위 등”이라며 “이 중에서도 감옥에까지 보내는 처벌은 폭력의 선동 등 극히 일부에 그쳐야 한다”고 밝혔다. 선거 때마다 창궐하는 지역차별적 언어나 외국인 혐오 부추기기 언사에는 규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선거의 핵심적 존재 이유라고 할 후보 검증 과정의 말을 문제삼아 정치인을 감옥에 처넣는 나라.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격이 1980년대 김근태를 고문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던 때의 그것과 과연 얼마나 다르다고 해야 할까.

 다음으로 정봉주의 ‘무죄’에 관한 이야기. 역시 논의의 편의를 위해 그가 한 말이 허위였다고 가정하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감옥에 보내는 건 아니라도 어떤 형태로든)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답변은 아마도 저 유명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1964년)일 것이다. “민주사회에서는 공공의 사안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돼야 하며, 그러다 보면 간혹 잘못된 사실을 언급하게 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이를 보장하지 않으면 표현의 자유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숨 구멍조차 막게 된다.” 따라서 공직자 및 공공의 사안에 대한 비판은 잘못된 사실에 근거했더라도 매우 제한된 경우에만 규제해야 하며 그 기준은 ‘실제적 악의’(actual malice)라고 판시했는데, 이는 ‘허위의 사실이란 점을 분명히 알았거나, 허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인식하면서도’ 발언을 한 경우를 뜻한다. 단지 조사가 미진해서 사실을 정확히 모른 채 말한 것은 ‘실제적 악의’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기준에 비춰보면, 정봉주는 당시나 지금이나 자신의 발언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또한 당시는 비비케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일었고 급기야 특검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특검 수사결과는 선거가 끝난 뒤에야 나왔다. 적어도 발언 당시는 상당한 의혹이 있는 상황이었다. 또 하나 ‘설리번 판결’과 ‘정봉주 판결’이 다른 점은 미국의 경우 소송을 제기한 공직자에게 해당 발언이 허위 사실임을 입증하도록 한 반면, 우리 법원은 우선적으로 발언자에게 허위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한발 더 나아가, 정봉주가 공격한 인물은 일반 공직자가 아닌 ‘선거 후보’였다는 특수성도 생각해볼 일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또 다른 판결을 통해 선거 국면에서 표현의 자유가 지니는 특별한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정치·사회적 변화를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해야 하며, ‘국민의 종’을 뽑는 선거 과정에서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가장 완전하게, 또한 가장 시급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선거에서 무결점의 경력과 높은 인품을 내세우는 공직 후보라면, 이를 공격하는 정적이나 언론에 ‘파울!’이라고 외쳐선 안된다.”(‘모니터패트리어트 대 로이’ 판결·1971년) 유럽인권재판소도 정치인에게 소송을 당한 오스트리아 언론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치인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철저한 검증을 받는 위치에 스스로 나선 것인 만큼, 비판에 대해 남들보다 더 큰 관용을 보여야 한다”고 판시했다(‘린겐스 대 오스트리아’ 판결·1986년). 상식적으로, 선거는 일방적인 게임이 아니다. 후보 검증이든 정책 검증이든 공방이 있게 마련이고 결국 주권자인 국민이 표로써 판정을 내리는 신성한 토론의 장이다. “제기된 의혹이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는지” 여부는 법정에서 형사처벌을 내리기 위해 판사가 따질 문제가 아니라, 유권자들이 표를 던지기 위해 판단할 문제인 것이다. 근거 없는 황당한 공격을 하는 쪽은 그만큼 표를 잃을 위험도 떠안는 셈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존 스튜어트 밀의 지혜에 가 닿는다. “진실은 허위와 부딪침으로써 오히려 더 분명하게 인식되고 더 생동감있게 모습을 드러낸다.”(<자유론>)

 이제,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전제가 됐던 마지막 문제를 살필 차례다. ‘정봉주의 발언은 과연 거짓이었나?’ 비비케이에 대한 국민적 의혹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나꼼수>에 쏟아지는 저 열광이 이를 입증한다. 의혹이 사실무근이라는 검찰·특검의 결론을 믿을 것인지 여부는 국가가 강요할 일이 아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신뢰 여부 역시 유권자들이 내리는 정치적 판단 중 하나일 뿐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나쁜 정부를 일찌감치 예견하고, 수상한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면 다가오는 독재의 냄새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했다. 나쁜 정부를 막으려면 그 냄새를 맡은 이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봉주는 한 대통령 후보의 적격성에 대한 의문을 부지런히 제기함으로써 그가 당선됐을 때 우리사회에 가져올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여기저기 허물어져 내리면서 그 우려가 현실이 됐음을 모두가 목도하는 지금, 그는 감옥에 갔다.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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