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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돈봉투 고백

등록 2012-01-29 19:18

김용철 종합편집팀 기자
김용철 종합편집팀 기자
부당한 관행이
계속 묵인되면
편법과 폭력이
질서가 된다
고3 때 선생님 가정방문이 있었다. 선생님은 자동차를 타고 좁은 달동네 골목길에 들어섰다. 차가 긁힐까 긴장한 듯했다. 피곤한 표정이 묻어났다. 집안에 들어선 선생님께 박카스 한 병을 건네드렸다. 부모님은 안 계셨다. 별말씀이 없으셨다. 가정방문이 끝나면 교실엔 누구네 집에서 촌지를 받았다는 말이 돌았다.

고2 때 선생님 가정방문이 있었다. 선생님은 걸어서 왔다. 첫 담임을 맡은 선생님은 활기가 넘쳤다. 사는 형편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던 누나가 귀향해 집에 있었다. 누나는 하얀 봉투에 2만원을 넣었다. 다들 그러더라고 했다. 선생님은 받지 않았다. 집에 보태 쓰라고 했다. 부끄러웠다.

정치권 돈봉투를 보며 20년도 더 된 고등학교 때 경험이 떠올랐다. 정치인들이 돈봉투 전당대회를 바라보는 ‘관행’이라는 시선 때문이었다. 잘못인 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정치 현실이라는 항변이다. 관행이니 덮고 가자는 말이다. 양심선언이나 고해성사가 아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관행으로만 치부할 수 없게 되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전당대회 동원 비용을 아예 합법화하는 쪽으로 손을 잡는 모양새다. 관행을 벗을 테니 그 비용을 세금으로 벌충해 달라는 꼴이다. 뻔뻔함이다. “내가 돈봉투를 줬다” “나도 받았다”라는 진솔한 고백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총선 공천을 목전에 두고 있는 그들에게 고백은 바보짓일지 모른다.

정치인들이 쉽게 관행이라고 말하지만 돈봉투는 비리의 온상이다. 받는 쪽은 언젠가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고, 주는 쪽은 언젠가 이익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구조다. 기브 앤드 테이크.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일단 뿌려라, 언젠가 돌아온다.’ 정치 영업의 기본이다. 공정경쟁과 윤리의식을 찾기 힘들고, 명백한 불법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있어?’ ‘좋은 게 좋은 거야.’ 모두가 공모자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결국 부당한 관행이 묵인되며 편법이 질서가 된다.

침묵의 관행에 맞선 작은 움직임이 큰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뜻있는 교사들의 자정선언으로 학교 촌지가 줄어든 것처럼. 미국 민권운동의 상징이 된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촉발시킨 로자 파크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사람들은 내가 몸이 피곤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친 것이 있다면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에 지쳤을 뿐이다.” 그녀의 저항이 도화선이 된 승차거부 투쟁은 버스 내 인종분리 규정의 폐지로 이어졌다.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길들여지지 않는다. 알아서 기지 않게 된다. 편법과 변칙이 사라진다. 하지만 자유와 인권을 가르쳐야 할 학교는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교실 안엔 폭력과 침묵의 관행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현실 앞에 폭력이 일상으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 다행히 서울시교육청은 집회의 자유와 체벌·따돌림 등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명시한 학생인권조례를 26일 공포했다.

사실 세상을 더 살 만한 곳, 더 정의롭고 자유로운 곳으로 만드는 싸움은 장기전이다. 한판 승부가 아니다. 관행을 깨는 데는 고통이 따르지만, 자유를 얻게 된다.

정치인들이 돈봉투를 계속 관행으로 여기는 한, 학교폭력 앞에 숨죽이며 지내는 아이들이 ‘관행이니 참아야 하느냐’고 물을 때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하다. 나를 부끄럽게 만든 선생님이 그립다.


yckim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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