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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대마초 합법화를 주장한 판사 / 박용현

등록 2012-02-05 19:31수정 2012-02-05 19:33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가카 빅엿”에 분개하는 이들이나
재임용 적격 운운하는 대법원도
정작 핵심 문제엔 관심 없어 보인다
1992년 4월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법원의 제임스 그레이 판사가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마초와 코카인, 헤로인의 개인적 사용을 합법화하라고 촉구했다. 지금은 비슷한 주장이 종종 들리는 미국이라지만, 당시로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각계에서 폭풍과도 같은 인신공격이 쏟아졌다. 오렌지카운티 보안관은 그를 끌어내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정작 법원은 침묵했다. 그레이 판사는 사전에 법원장한테도 알리고 법조윤리위원회와도 상의했다는데, 위원회에서 의견이 나뉘긴 했지만 결국 그를 막지는 않았다.

판사들의 이런저런 돌출(?) 발언이 계속 논란이 되는 요즘, 꼭 20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참고해볼 만하다. 특히 “그는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행사했을 뿐”이라며 그레이 판사를 옹호한 오렌지카운티 변호사협회의 태도가 눈길을 끈다. 협회는 다수가 혐오하는 주장을 폈다는 이유로 그 개인을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의견 자체를 논박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맞다. 법관의 발언은 어느 정도 제약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목적이 단지 다수(혹은 특정 세력)가 싫어하는 의견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다. 법관은 오로지 법과 양심의 인도에 따라 99%가 탄압하는 1%의 권리까지도 보호해주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아닌가. 더구나 최근 문제된 발언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에스엔에스 검열 등 중대한 사회·인권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이게 마음에 안 들면 반박을 할 일이지, 저 서부의 보안관처럼 무식하게 협박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법관의 발언을 규제해도 되는 경우는 언제일까? 판사들의 발언에 발끈하는 이들은 그 주제만큼이나 표현(“뼛속까지 친미” “가카의 빅엿” 따위)을 문제삼는 듯한데, 주로 정치적 중립과 품위를 들먹인다. 그런데 법관윤리강령에서 말하는 정치적 중립이란 재판에서 정치적 성향을 발휘해 판결을 왜곡하지 말라는 얘기다. 페이스북이 아니라 판결문에서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 판사들부터 공론화해야 한다. 품위 문제에 관해서도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발표한 ‘2011년 법관 평가’를 보면, 이혼소송 당사자에게 “20년 동안 맞고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라”고 한 판사를 비롯해 막말 사례가 수두룩하다. 페이스북에서 대통령을 조롱한 판사와 법정에서 재판 당사자에게 막말을 내뱉은 판사 중 누가 더 비난받아야 할까? 후자는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른 품위 문제다.

국민의 신뢰야말로 사법부가 존립하는 근거이자, 법관의 발언을 규제해야 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이유다. 미국에서 법관의 발언을 제약하는 것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재판의 공정성에 상처를 주는 경우다. 따라서 단지 관찰자로서 일반적인 사회적 문제에 의견을 표명하는 행위는 보장된다. 그레이 판사의 경우가 그랬다. 판사들의 발언을 비난하고 벌주려면 이렇게 재판의 공정성을 해침으로써 국민의 사법부 신뢰를 떨어뜨렸는지부터 따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가카의 빅엿”에 분개하는 이들이나 재임용 적격심사 운운하는 대법원도 정작 이 지점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압력 사건은 사법부 불신의 거대한 근거를 제공한 최악의 사건임에도, 그는 버젓이 이 나라의 대법관이니 말이다. “가카의 빅엿”을 무조건 옹호할 생각은 없다. 토론이 필요하다. 법관 발언의 제약요건, 정치적 중립의 정밀한 의미, 법관에게 품위란 무엇인지…. 다만 그 초점은 국민의 사법부 신뢰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자면 이 모든 토론에는 전제가 있다. 신영철 대법관이 물러나는 것이다.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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