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재벌문제의 해결 없이는 한국 경제에 미래는 없다. 시장경제의 가장 큰 적은 힘의 집중과 힘의 남용인데 재벌이 바로 이 힘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재벌한테 너무 많은 힘이 집중되고 그 힘이 남용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우리 현실이다. 시장은 이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시장경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큰손이 시장을 좌우하는 한 그것은 더 이상 시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더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정치권에서는 이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 없이 중구난방으로 재벌정책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내용도 부실할 뿐만 아니라 실현가능성도 없는 얘기들만 하고 있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오직 유권자를 현혹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그래 왔듯이 선거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벌들과 다시 영합해버릴 것이 뻔하다. 선거만 없으면 재벌들과 함께 노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유리한 일이다. 먹을 것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재벌은 탐욕이 본성이다. 탐욕스러웠기 때문에 오늘날의 재벌을 일굴 수 있었다. 그게 정상이다.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고, 그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돈이 된다면 어떤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덤벼드는 것이 기업이다. 재벌정책은 이런 재벌의 본성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기업윤리를 들먹이는 한심한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재벌은 탐욕이라는 본성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정책은 그 본성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도 발현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집행하면 된다.
물의 본성은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다. 홍수를 일으키고 농경지를 뒤덮는다고 물을 위로 흐르게 할 수는 없다.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의 본성을 인정하면서 둑을 쌓고 댐을 만들면 수력발전도 할 수 있고, 농경지를 개척할 수도 있다. 재벌정책도 마찬가지이다. 탐욕이라는 본성을 인정하면서 그 본성이 국가경제의 이익과 합치하도록 둑을 만들고 댐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이런 댐과 둑을 모두 허물어버렸다. 출자총액제한제를 없애버리고, 지주회사 규제를 없애버리고, 금산분리제를 없애버렸다. 거기다가 물이 가속도가 붙어 더욱 힘차게 둑을 밀고 나가게 해주었다. 바로 부자감세 정책이다. 탐욕에 가속도까지 붙여주었다. 이런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 없이는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정치권이 이미 약효가 빠져버린 흘러간 노래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둑이 무너지고 댐이 허물어져 새로운 물길이 생겨버렸는데 옛날 장소에 다시 둑을 쌓고 댐을 만들어서는 물을 가둘 수 없다. 재벌도 이제 옛날 재벌이 아니다. 주변의 경제환경도 옛날과 달라져버렸다. 재벌정책도 이제 새로운 수단을 도입해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과거 식의 정책수단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재벌은 이제 2·3세 경영 시대로 내려와버렸고, 경제환경도 극단적인 국제화 시대로 이동해버렸다. 재벌정책이 처음 설계되었던 1987년과는 전혀 다른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정책을 도입해야 재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선 소수의 재벌에 경제적 힘이 지속적으로 집중되어가는 현상을 차단해야 한다. 그다음은 집중된 힘이 남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과거 식의 출자제한 등으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재벌과 하청업체와의 거래, 재벌과 친인척 계열사와의 거래, 재벌의 새 영역 진출 등이 시장친화적이고 시장원리에 맞도록 강제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야 재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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