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균 복지국가여성연대 대표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복지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이행 여부를 떠나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 발표되는 내용을 보면 여전히 개별적인, 다분히 선심성 프로그램 위주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건설한다 함은 무상보육이나 무상급식과 같은 개별 프로그램을 뛰어넘는 현대사회의 근본 문제에 대한 정리와 국가 운영방식의 새로운 틀을 짜는 것이다.
북유럽이나 영국, 독일 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나름대로 성공적 복지국가로 자리매김해왔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 야기된 재정위기, 고실업, 인구구조의 고령화 등으로 완전고용과 같은 전통적 복지국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최근 20여년간 세계화와 지식정보기술에 따른 변화된 사회 환경에 대응하려는 새로운 복지국가로의 개혁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 이 ‘새로운 복지국가’의 핵심은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전제로 한 양성평등 관점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전통적 복지국가의 경험이 약한 상태에서 선진국이 당면한 문제에 고스란히 노출된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저출산 고령화에 따르는 인구구조의 불균형이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될 경우, 연금의 불안정성은 물론이려니와 노동력의 노쇠화에 따른 경제의 경쟁력 상실을 면하기 힘들다. 따라서 미래의 노동시장은 여성의 경제동력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 노인층의 빈곤화와 자살률은 이미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중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 40%가 많으며, 노년으로 갈수록 여성은 더욱 가난하다.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여성은 앞으로가 더더욱 문제이다. 또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비정규직 여성은 사회보장제도와 무관한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남성 가장이 부인과 자녀를 양육하는 이른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맞벌이를 해야만 그나마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고, 맞벌이는 앞으로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이 전일제 직장생활을 할 때 출산, 육아, 가사 등 집안의 “소는 누가 키우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롭게 대두된 사회문제의 대부분이 여성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현대 복지국가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출 수 있느냐 하는 관건은 여성문제를 어떻게 얼마나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의 여성은 가장 취약한 계층이면서 동시에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기능을 떠안고 있는 집단, 복지국가로 가는 길의 동력인 셈이다.
여성의 빈곤화를 방지하고 결혼, 출산, 보육 그리고 직업생활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남녀가 공히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동시에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육아와 가사 부담을 분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간이 단축되어야 하며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출산·육아휴가를 사용해야 하고, 의례적인 직장 술자리 문화가 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모든 정책개발 과정에는 양성평등 관점이 녹아 있어야 하고 특히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넘어서서 이제는 남녀가 동등한 조건과 자격으로 가정생활과 노동에 참여하는 ‘양성평등형 맞벌이 모델’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복지국가는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발생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가족과 같이 돌보아주고 뒷받침해주는 사회제도를 갖춘 나라를 일컫는다. 먹고사는 문제는 기본이고, 누구나 일을 할 수 있도록 알맞은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자녀 교육과 질병 문제를 사회가 돌보고, 출산과 양육의 문제를 여성 혼자가 아니라 남녀가 공동으로 책임지며 이를 사회가 적극적으로 돕는 등 국가가 마치 확대된 가족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모습이다.
복지선진국인 스웨덴은 1900년대 초반 빈곤과 불평등 사회를 극복하고자 “국가를 국민의 집으로”를 주창하며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복지국가의 내용을 선포했다. 그 내용의 기조는 양성평등을 이루는 가족정책과 노동시장정책, 그리고 이를 양 기둥으로 한 교육과 의료정책의 공공화 및 노인에 대한 사회적 책임 등이다. 이 기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며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복지가 시혜적·선별적 복지를 벗어나 보편성을 확보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신필균 복지국가여성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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