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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봄, 이병철의 질문을 다시 생각한다 / 박용현

등록 2012-03-04 19:17수정 2012-06-06 11:02

박용현 오피니언넷부 부장
박용현 오피니언넷부 부장
‘영혼의 질문’이 가능했겠는가
기업이란 “걷어찰 몸뚱이도,
저주할 영혼도 없는” 존재이니
햇볕의 밀도가 바뀌고 초목이 연둣빛 새싹을 내밀어 인사하는 이맘때면 불현듯 답 모를 질문들을 떠올린다. 생명의 유전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섭리 뒤엔 신의 입김이 있는가, 삶의 유한성과 시공의 영원성은 어떻게 관련된 것인가…. 지인의 부음이 문자메시지에 뜬 멍한 순간에도, 밤늦게 귀가해 잠든 아이의 평화로운 얼굴에 탄복할 때도, ‘원 모어 컵 오브 커피’ 같은 노래를 들을 때도…. 나는 잘 살고 있는 건가, 묻게 된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도 ‘영혼의 질문들’을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죽음에 직면한 마지막 순간에야 질문을 떠올리고, 답도 구하지 못한 채 떠나갔을까. 생각해 보니,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이 영혼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궁구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다. 한 영국 판사의 표현대로, 기업이란 “걷어찰 몸뚱이도, 저주할 영혼도 없는” 존재이니. 자연인과 구별되는 법인이란 기업의 본질을 묘사한 표현이지만, 그런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하는 기업의 막장 행태를 암시하는 듯해 묘한 울림을 준다. 사실 기업은 영혼을 지닌 자연인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일들도 이윤 추구를 위해 가차없이 저지르곤 한다. 자동차의 연료탱크 결함을 발견하고도, 이로 인해 사고가 날 확률을 따져본 뒤 피해자 보상비가 리콜 비용보다 적게 나타나자 그냥 방치했던 미국 포드사 같은 경우다. 이 핀토자동차의 폭발 사고로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었다. 이처럼 경영진 개인의 인성과는 무관하게 돈의 힘, 이윤의 관성에 포획돼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변하는 기업의 모습을 학자들은 ‘기업의 사이코패스적 성격’이라고 개념화한다. 여기에서 기업 리더가 차지하는 몫이 크다고 한다.(<기업범죄연구 I>)

그러니 영혼을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이병철 창업주의 회한도 그 후예들에게는 아무런 교훈을 주지 못한 듯하다.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망을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21세기에도 ‘무노조’라는 전근대적 모토를 밀어붙이고, 중소기업과 골목상인들의 몫을 마구 빼앗아가더니, 이젠 세금도 안 낸 상속재산을 두고 혈족끼리 소송에 미행까지 법석을 떨고 있으니. 삼성은 상속재산 분쟁과 관련해 “앞만 보고 달려가도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기업에 자기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나 함께 사는 이웃의 삶이나 자기가 뿌리박은 공동체에서의 평판 등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터. ‘사이코패스적 성격’ 그대로다. 사이코패스 치료는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포기해선 안 된다. 맹목적인 이윤 추구라는 굴레에 갇힌 기업인들의 영혼도 구원받아야 한다. 기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가며 자연인으로서 차마 못할 일들을 담당해야 하는 직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기업의 본질 탓에 스스로 치료하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공동체가 도와야 한다. 기업의 비뚤어진 행태에 대한 규제는 그래서 오히려 구원의 손길인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ISO 26000)이나 유엔의 ‘기업과 인권에 관한 지도원칙’(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등은 복음서에 해당한다. “신은 사랑과 수학의 결합”(영국 성공회 윌리엄스 대주교)이라는 말을 기업경영 버전으로 옮긴 것이라고나 할까.

설사 이런 데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더라도, 이맘때면 여린 새싹이 속삭여주는 질문들에 귀를 열었으면 한다. 이병철 창업주처럼 삶의 불꽃이 스러질 무렵에야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따위 질문을 던진들 답은 너무나 지리멸렬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은들, 생명의 유한성은 남의 몫을 가져다 자기 그릇을 채울 수 없으니 말이다.

박용현 오피니언넷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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