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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백기완 선생 팔순 / 공지영

등록 2012-03-15 19:31

공지영 소설가
공지영 소설가
앞으로 남은 시간 그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이 허락되기를, 더 이상 그를
시위현장 찬 바닥에 불러내지 않기를
설사 내게 이 세상의 모든 종이를 준들, 설사 내게 마르지 않을 프린터의 잉크를 가져다준들 내가 이 사람을 서술하고 묘사해낼 수 있을까. 이 사람을 써내려면 지도를 가져다 놓고 가시 돋친 철조망으로 한반도의 생살을 가른 다음 그 위에 역사책을 포개고 그러고도 모자라 활자로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덧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가진 거라곤 슬픈 몸뚱이뿐인 실향민들의 망연한 눈동자와 피 젖은 노동복과 찢겨진 깃발과 죄 없는 시위대의 핏점이 묻어난 몽둥이 같은 것, 광화문 대학로 거리를 불어대던 최루탄 섞인 바람과 놀라 날아오르던 새들의 날갯짓과 보랏빛으로 질리던 꽃잎의 얼굴 같은 것. 그 위에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던 모든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도.

그래, 그 사람이 여기 있다. 나는 그를 여러 번 보았다. 거리에서 시위대 행렬 속에서 농성장에서. 내 나이 스물부터 그러했으니 거의 삼십년이 지난 일이다.

나는 그의 큰딸 백원담과 가장 친한 친구이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에 나오는 그 ‘담아’가 바로 그녀다. 그렇게 자란 백원담은 노동운동을 하다 지명수배되고 나는 그의 심부름을 위해 기자촌 백 선생의 집에 드나들었다. 백호랑이처럼 용맹하던 그는 집안에서는 뜻밖에도 설거지를 하고(절대 세제를 쓰지 않고 밀가루와 뜨거운 물만으로),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바라지하는 살뜰한 분이었다. 나는 그가 일하는 아내를 위해 막내를 업고 아침마다 위의 세 아이의 도시락을 쌌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옳은 말 하는 사람은 많고 목소리 큰 사람도 많지만 내 마음속 깊이, 내가 하염없는 존경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게 된 것은. 1930년대생인 그가, 솔직히 어떤 페미니스트 교육도 민주주의에 대한 소위 정규교육도 받지 않은 그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내게는 어쩌면 경이였다.

박정희·전두환 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80㎏에 육박하던 몸이 38㎏으로 줄었을 때 그는 난방도 되지 않는 한겨울 감방에 내동댕이쳐진 적이 있다고 했다. 누구도 그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그때, 시인 김지하가 옆방에 있다가 급식 속에 섞여 나오는 검정콩을 씹어 암죽처럼 만들어 백기완 선생의 입에 넣어주어 그를 살려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이후로 그는 김지하를 절대 헐히 말하지 않는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그의 진영에는 차가 없었다. 마침 그때 내게 1500㏄ 새 차가 생겼는데 내가 그것을 빌려드렸다. 1500㏄로 대통령 후보를 싣고 다닌 차는 아마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 차를 타고 대학로를 누비고 티브이 화면에 나타나 그는 처음으로 진보를 남한 사회에 공식적으로 데뷔시켰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 나는 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운동꾼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시민운동가도 아니고 바로 시인이라는 걸.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그의 시라는 걸, 그가 시집을 여러 권 낸 시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그렇게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세상에서 제일 드센 운동꾼이 된 그의 운명은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싶었으나 운동가가 된 모든 노동자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정치와 시민운동으로 나선 모든 이들의 이름과 함께, 그냥 소설가로 남고 싶었으나 이 세월에 휘말려 버린 작가·시인들과 함께 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백기완 선생이 80을 넘기셨다. 부디 앞으로 남은 시간은 그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이 허락되기를, 더 이상 젊은 우리들이 그를 시위현장의 찬 바닥으로 불러내지 않기를…. 이 염원을 그의 팔순 생일에 바친다.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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