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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프라이버시의 세 차원 / 박용현

등록 2012-04-29 20:16

박용현 사회부장
박용현 사회부장
김형태 당선자의 성추행 문제를 보며
정봉주 전 의원을 떠올리게 된다
선거 때 입을 막을 것인가, 풀 것인가
김형태 국회의원 당선자(경북 포항남·울릉)의 동생 부인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건 4·11 총선을 사흘 앞둔 때였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 기막힌 추문에 입을 닫았다. 침묵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의도와 사정이 자리잡고 있겠지만, ‘선거 막판에는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린다’는 고정관념과 자칫 폭로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경우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한 걱정도 그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선거 이후 우리가 지켜봤듯, 저 추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며 포항 유권자들은 그런 인물을 정치적 대표로 선출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 선거 후보에 대한 비판과 검증을 최대한도로 보장하지 않고 허위사실 공표니 흑색선전이니 하는 법적·언어적 족쇄를 채우는 선거 풍토가 빚어낸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정봉주 전 의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선거 과정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선거 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근거가 박약한 의혹의 제기를 광범위하게 허용할 경우… 후보의 명예가 훼손됨은 물론 임박한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오도하는 중대한 결과가 야기되고 이는 오히려 공익에 현저히 반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이유로 언론과 유권자로 하여금 단단히 입조심을 하게 만든 결과는 어땠는가. 김형태 당선자의 사례야말로 법원의 우려와 정반대 방식으로 “임박한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오도”한 게 아닌가.

공직자나 공직 후보는 대중으로부터 혹독한 검증을 받기로 자처한 사람이다. 서로 펀치를 주고받는 데 합의하고 링 위에 오른 권투선수가 아무리 맞은들 상대 선수를 고소할 수 없는 것처럼, 선거전에 뛰어든 이는 프라이버시의 보호막을 상당 부분 스스로 거둔 셈이다. 그것은 막강한 권한을 그에게 줘도 되는지 유권자가 제대로 판단하게 한다는 민주주의적 요구에도 부합한다.

다른 차원의 문제를 보자. <한겨레>는 지난 23일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의혹을 특종 보도한 뒤 닷새 동안 ㈜파이시티 전 대표 이정배씨를 ‘ㅇ대표’로 익명처리했다. 다른 매체들은 서둘러 그의 실명을 공개했지만, <한겨레>는 이 전 대표가 여러 언론 인터뷰에 응함으로써 스스로 신원을 드러낸 뒤에야 실명 보도를 시작했다.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법한 익명 보도를 고집한 것은 형사사건 관련자의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자체 보도준칙 때문이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어떤 사건에 엮여 들 수가 있는데, 그때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신원이 노출된다면 프라이버시가 설 곳은 없다. 그 사건이 공익적 관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고 관련자가 스스로 대중의 주목을 끌어당긴 경우가 아니라면 프라이버시는 존중돼야 할 것이다.

최근 상세한 전모가 드러나고 있는 민간인 불법사찰은 또다른 차원의 프라이버시 문제다. 불법사찰은 아무런 공익적 필요성도 없이 사적 공간을 침탈한다. 아니, 민주주의 파괴라는 철저한 반(反)공익적 결과를 낳는 행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적 공간은 그저 사회와의 단절을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개인이 사회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 개성과 정체성을 찾는 공간이며, “인격적 정체성이 없다면 획일화된 형식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게 되고, “전체주의 정권이 온 힘을 다해 프라이버시를 파괴하려는 까닭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이진우, <프라이버시의 철학>)

요즘 프라이버시의 세 차원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를 보면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를 두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가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박용현 사회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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