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만 문화·스포츠 에디터
얼마 전 공영방송 주말 프로그램에 배우 배두나가 출연해 강연을 했다. 그가 주역인 영화 <코리아> 홍보를 위한 의도가 컸을 것이다. 그의 얘기 가운데 흥미로웠던 대목은 대박 뒤에 흘린 눈물에 관한 것이다. 연예계의 소모품이 되길 거부하고 연기를 하기 위해 선택한 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흥행 참패 뒤에도 그는 여러 차례 영화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드디어 <괴물>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기쁨이 아니라 서러움의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배우는 흥행을 간절히 원하지만, 배우의 노력과 흥행은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 처음 맛본 대박의 순간, 그의 눈에 배우의 실체가 좀더 또렷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배우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감독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존재다.
<코리아> 속 배두나의 모습에서 이런 깨달음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영화 캐릭터 리분희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하려는 배두나의 욕망이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실제 리분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감독의 머릿속에 있던 리분희, 과묵하면서 의지력이 강한 탁구 천재의 모습을 화면 위로 옮기는 데 철저히 집중하고 있다.
배두나의 모습에 영화감독 이명세가 겹쳐졌다. 그는 <미스터 K>라는 영화를 찍다가 얼마 전 제작사에 의해 감독직에서 잘렸다. 2시간 가운데 고작 6~7분 분량을 찍은 시점이었다. 돈을 댄 이들은 이 감독의 촬영분을 두고 내러티브는 없고 이미지만 있고, 캐릭터가 억지스럽고 과장됐다고 고개를 저었다. <7광구> <퀵> 같은 전작에서 흥행 실패를 겪은 제작사가 이 영화에 투입하기로 한 돈은 100억원. 이 영화에 회사의 명운이 달렸다고 생각했을 이들이 내린 선택을 섣불리 비판하기 힘들다. 애초 스타일리스트 이명세를 왜 선택했느냐고 항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택이 완벽할 순 없지 않은가.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의 패배를 아무 일 없이 넘기긴 힘들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이를 두고 “주류 (영화)산업 안에서 감독과 제작자의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안타까워했다.
감독 교체 뒤 <협상종결자>로 이름까지 바꾼 이 영화엔 설경구·문소리 같은 한국 영화판의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한다. 영화는 감독의 이야기이고, 거기에 자신의 꿈을 담아야 한다고 믿는 배우들에게 이 감독의 절망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의 우상인 배우와 함께 웃고 울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들에게도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계를 보면 <도가니> <화차> <건축학 개론>과 같이 감독이 절실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실어 날랐던 여러 작품이 관객을 많이 모았다. 반면 흥행을 위한 기획의 흔적이 과했던 대작들은 반대의 운명을 겪었다.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재미는 ‘진한 감동’이다. <건축학 개론>이 20여년 전의 문화적 풍경을 우리 앞으로 이끌면서, 많은 이들을 사로잡은 것은 누군가의 정신회로를 통해 걸러진 섬세하고 순수한 감수성 때문이다. 누군가는 물론 영화의 주인공, 감독이다.
배두나는 선배 고현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화 관객 수준도 올랐는데) 대중예술인이라면 반 발짝 앞에서 끌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 배우의 바람이 주류 영화산업의 제작자와도 맞닿는 상상을 해본다. 그래서 감독과 제작자 모두 승자가 되는 피날레도.
강성만 문화·스포츠 에디터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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