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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카멜레온의 눈으로 / 박용현

등록 2012-05-27 19:14

박용현 사회부장
박용현 사회부장
‘미란다 원칙’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이 원칙이 태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준 에르네스토 미란다가 어떤 사람인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범죄 피의자에게도 자기방어를 할 당당한 권리가 있음을 천명한 이 획기적 원칙은 성폭행범 미란다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1966년)에서 나왔다. 미란다는 이 원칙의 첫 수혜자로서 풀려났지만, 곧 다른 증거가 드러나 유죄판결을 받는다. 더구나 출옥 이후 도박판에서 싸움을 벌이다 흉기에 찔려 숨진다. 천생 범죄꾼이었다.

이처럼 인권 문제에서 제도적 진전을 이룬 계기는 대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나 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다수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이 주인공이었으며, 이들에게도 인간이라면 최소한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숭고한 인식이 추동력이 됐다.

독일연방기본법(헌법)이 사형제 폐지와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못박고 있는 것도, 사형수들이 선량하다거나 징병제 국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다수의 지지를 받기 때문은 아니다. 노르웨이에서 76명을 살해한 극우 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를 욕실과 평면텔레비전, 냉장고까지 갖춰진 감방에서 살게 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그 사회 전체가 인간 존재 방식의 최저선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들 가운데 가장 천한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도 최소한의 품위를 보장해줄 것이다. 나라마다 형사절차, 양심과 표현의 자유, 수형생활 등에서 권리의 보장 정도가 천차만별인 이유를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우리도 사람의 권리 문제를 다룰 때는 당사자에 대한 평가에서 한 발 떨어져 우리 사회 전체의 품격을 돌아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건들에서.

이른바 ‘화학적 거세’가 처음 실시된다. 당사자는 정신감정 결과 소아성기호증으로 진단된, 어린이 대상 성폭력 전과 4범이다. 나쁜 자다. 하지만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아동 성범죄 예방을 위해 무진 노력하되 화학적 거세라는 인권침해적인 방법은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우리와 달리 본인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구속집행정지 심문을 앞두고 검찰과 법원도 모르게 외부 병원에 입원해버렸다. 대통령 측근인 그가 구치소 안에서도 특혜를 누렸다는 비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구금시설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해 사망했다는 유족의 절규가 종종 들려오는 우리 사회에선 오히려 좋은 선례로 기록될 만하다. 앞으로 모든 재소자가 최 전 위원장과 같은 처우를 받게 된다면, 그는 이 방면에서 미란다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검찰이 당원명부 등이 들어있는 통합진보당 서버를 통째로 압수해 갔다. 진보당 당권파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당원명부가 외부에 유출됨으로써 당원들의 프라이버시와 결사의 자유가 훼손되는 문제는 별개의 시각으로 볼 문제다. 검찰이 당원명부에 접근하는 방식과 범위에 대해 지금 최소한의 선을 그어두지 않는다면, 언제 어느 정당을 대상으로 같은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며칠 전 한 보수신문은 진보당 압수수색에 반발해 검찰청사에서 시위를 하다 붙잡힌 대학생들이 “약속한 듯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트집 잡았다. 묵비권은 미란다 원칙으로 확립된 권리다. 46년 전 미국에서 성폭행범 미란다가 누린 사람의 권리가 오늘 대한민국에서 진보당을 지지하는 대학생들에게는 부정돼야 한다는 말인가.

썩 내키지 않더라도, 좀 번거롭더라도, 꼭 카멜레온의 눈으로 바라봐야 할 일들이 있다.

박용현 사회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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