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강기훈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4인 병실을 한참 두리번거리고서야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히, 허여멀건 얼굴에 훤칠한 키였는데, 거무튀튀한 낯빛으로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눈은 퀭하니 꺼졌고, 눈 밑 그림자는 짙었다. 큰 수술을 받았단다. 그의 입에서 “생존 확률 50%”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사건이 났을 때 29살이었는데, 이제 50살. 그의 젊음은 그렇게 앙상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21년 전 병아리 기자 때 얘기다. 시위 중 사망한 강경대의 장례식을 취재하고 있는데, 삐삐가 요란하게 울렸다. 무조건 강기훈을 찾아내서 신문사로 데리고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마침 강기훈이 장례행렬에 있던 참이라,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회사 선배는 다짜고짜 김기설의 유서를 내보이며 써보라고 했고, 강기훈은 얼결에 써보였다. 그때만 해도 우린 사태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야, 그러고 보니 필체가 비슷하네”라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 뒤 한달 넘게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어느 날인가에는 “하도 나를 한국의 드레퓌스라고 해서 뒤늦게 책을 읽어봤는데 너무 다르더라. 그건 100년 전 얘기고, 난 유대인도 아니잖아”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유대인 못잖은 편견의 대상 ‘재야 운동권’이었다. 구속이 됐고, 꼬박 3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이후 그의 삶은 가슴속 응어리를 풀기 위한 몸부림의 기록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2009년 서울고법으로부터 재심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검찰이 즉시 재항고를 했고, 사건은 대법원 양창수 대법관에게 배당됐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3년인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변호사가 빨리 결정을 내려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기자들이 취재 차원에서 진행 상황을 알아보려고도 했으나, 대법원은 한마디 대꾸도 없다. 강기훈의 변호사는 “지금 유무죄를 따져달라는 게 아니고 재심을 시작할지를 결정해달라는 건데 왜 이렇게 오래 끄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들리는 말로는 양창수 대법관이 아예 연구관들에게 사건 검토를 맡기지도 않은 채 기록을 캐비닛에 묵혀두고 있다고 한다.
한 판사는 “이 사건은 관련 판사들이 아직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고, 사법부가 직접 개입한 정도가 커서 결정을 내리는 데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1심 노원욱, 2심 임대화, 3심의 박만호 등 담당 재판관 모두가 양창수 대법관의 서울대 법대 선배들이다. 특히 “물증은 없으나, 정황증거로 유죄가 인정된다”던 노원욱 재판장은 양 대법관의 서울고 직계 선배다. 또 1970~80년대 간첩조작 사건은 검찰, 경찰, 안기부의 고문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90년대의 강기훈 사건은 최종 책임자가 사법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사이 강기훈은 병을 얻었다. 풀리지 않는 억울함, 잇따라 부모님을 저세상으로 보낸 자책감, 경제적 궁핍이 그의 몸을 갉아먹었다. 정기검진만 제대로 받았어도 일찍 이상신호를 알아차렸을 텐데, 공사판 막노동을 전전하기도 했던 그의 불안정한 생활은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만난 강기훈은 “21년 전 그 사건 이후로 난 한번도 좋았던 적이 없어. 특히 그 사건이 터진 5월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아파”라며 씁쓸해했다. 강기훈의 병을 아는 한 의사는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약화시켰고, 그게 병을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강기훈은 수술받기 직전에 변호사를 찾아갔다. 대법원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한번만 대법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다. 그의 마지막 몸짓에 대법원이 어떻게 응답할지 궁금하다.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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