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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임수경을 위한 변명 / 김정기

등록 2012-06-11 19:17수정 2012-06-12 10:55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임수경 의원이 한 탈북자에게 막말을 한 것에 대해 언론의 비판이 매섭다. <한겨레> 사설(▷ [사설] 임수경 의원, 겉치레 사과로 넘어가선 안 된다)은 임 의원이 말했다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에게 감히…’ 하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무척 실망스럽다”고 하면서, “임 의원이 벌써 오만한 특권의식과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 물든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그를 ‘종북주의자’라고 낙인찍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역사적 인물이고, 적어도 남북관계에서는 소중한 자산이다.

나는 임수경씨가 적어도 종북주의자라거나 관료주의에 물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행동을 상당 기간 지근거리에서 관찰해온 사람으로서 밝히고 싶다.

먼저 임씨는 과연 종북주의자인가? 종북주의의 개념은 잘 모르겠지만,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나 북한의 3대 권력세습을 무조건 따른다는 얘기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종북주의를 특징짓는 것이 이런 기준이라면 내가 관찰한 그의 언행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 한 신문의 칼럼 기사가 밝히듯 그가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을 때 그는 김일성 배지 착용에 손사래를 치는가 하면 붉은 머플러를 두르지도 않았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였다. 그의 행동에서 종북주의를 보았다면 그것은 산에서 고기를 낚았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2000년 9월3일 방송의 날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방송사 간의 오케스트라 교환방문을 축하한다며 방송인들을 위해 오찬회를 열었다. 그 자리가 무르익어 갈 즈음 헤드테이블 저쪽의 디제이가 두런두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임수경씨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의아해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임수경 의원
임수경 의원
김 대통령의 이야기는 이렇다. 임수경씨가 근래 평양을 방문했는데, 그가 김일성의 탄생 성지라는 만경대 방문을 애써 회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ㄷ대학의 ㄱ교수라는 사람이 임수경만도 못한 안목을 가진 게 아니냐고 말했다. 만약 임씨가 만경대에 가서 “만경대 정신을 기리며” 운운했더라면 전 평양시민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남북 화해나 통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오히려 남남갈등 더 나아가 남북갈등을 증폭시킬 것이 아닌가라는 설명이었다.

그가 탈북자 백요셉씨에게 ‘변절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는 데에는 언뜻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는 탈북자들의 인권을 포함해 북한 사람 전체의 인권에 대해 지금 탈북자 단체들이 벌이는 인권운동과는 인식을 같이하지 않은 데서 나온 돌출발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모든 언어가 그렇듯 겉말과 속뜻은 분리된다고 생각할 때, 그 속뜻은 ‘당신들은 북한 사람들의 인권을 오히려 망친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임수경씨와 나는 어떤 업보의 인연을 맺은 것 같다. 좋은 업보도 물론 있다. 그러나 2005년 일어난 업보는 결정적이었다. 나는 그해 여름 임씨가 박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논문 쓰기에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해 “올 여름방학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논문의 드래프트(초본)를 마치라”고 엄포를 놓고 말았다.

그해 여름방학 때 나는 일본에 가 있었다. 어느 일요일 지인인 일본인 교수와 산행을 하던 참에 서울의 조교한테서 전화가 왔다. “임수경 언니의 아들이 필리핀 영어연수 중 그만….” 나는 임씨가 이혼 뒤 아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잘 안다. 그는 그 뒤 3년 동안 사라졌는데, 절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지난 5월15일 스승의 날 임수경 의원이 마포의 한 게장집에 초청해 오랜만에 서로 환히 웃었다. 그 며칠 뒤 나는 작년에 써낸 <미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우송했는데, 그 속표지에 “임수경 의원께”, “수경의 빛나는 출사(出仕)가 한토(韓土)의 온누리에 비추기를!”이라고 썼다. 나는 임 의원의 막말 파동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남북한 간의 소중한 자산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보았다. 그는 자유인일망정 관료주의자도, 어느 여성 정치인처럼 국가지상주의자도, 게다가 종북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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