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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상이군인’과 ‘백원만 선생’ / 박용현

등록 2012-06-24 19:18

박용현 사회부장
박용현 사회부장
그 사람은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불쑥 나타나곤 했다. 함석판을 잇대어 만든 골목 끝 담벼락을 돌아 그가 등장하면 동네 꼬맹이들은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쳤다. 한쪽 다리의 무릎 아래가 비어 있었고, 지팡이가 절뚝이는 걸음을 지탱했다. 범접을 못했으니, 꼬맹이들은 그의 뻣뻣한 머리와 해진 옷가지에서 어떤 고약한 냄새가 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쉼없이 마른 침을 뱉어대는 소리만 멀찌감치서 두렵게 엿듣곤 했다. “동냥~ 퉤, 퉤, 동냥~ 퉤, 퉤.” 마당에까지 들어가 침을 뱉어대면, 어른들은 그의 손에 들린 밥그릇에 동전을 몇 개씩 넣어줬다. 어른들은 그를 “상이군인”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간혹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실례지만 백원만…”을 쉼없이 반복했지만,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학내 시위를 막느라 정문에 늘어선 경찰이 학생들의 가방을 뒤지며 검문하는 날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사계절 늘 같은 외투를 걸치고 등장하는 그에게, 입시나 고시에 실패해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라는 둥 그럴듯하게 위조된 사연들이 따라다녔다. 누가 그에게 백원짜리를 건네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먹고사는 것 같았다.

이 둘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곁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으니 자세한 경과는 알 수 없다. 그즈음의 시대상을 통해 어렴풋이 그들의 행방을 짐작해볼 뿐이다. ‘상이군인’이 꼬맹이들의 골목에 발길을 끊은 것은 1980년대 초.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세력이 ‘정의사회’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사회정화’ 드라이브를 걸 때다. ‘삼청계획’에 따라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니 ‘사회풍토 문란 사범’이니 하는 모호한 기준으로 6만여명이나 검거됐으니,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억울한 사연이 숨어 있었을지 능히 헤아리고도 남는다. ‘백원만 선생’의 행방과 관련해서는 한 정신과 교수의 설명이 작은 실마리를 던져준다. 학생들이 그의 부재를 눈치채고 낙향설·사망설 등 각종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것은 88서울올림픽 전후. 몇해 전 취재차 만난 정신과 교수는 바로 그 무렵 정신장애인에 대한 대대적인 시설 수용이 이뤄졌다고 했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이전에 동네마다 한명씩은 보였던 ‘머리에 꽃 꽂은 처녀’라든가 ‘백원만 선생’ 같은 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다수가 그다지 반기지 않는 인물이고 주위에 돌봐줄 사람도 없다는 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든 ‘처리’하면 좋겠다는 유혹은 늘 있어왔다. 그러나 정의사회나 선진국가를 구현하려면 이들보다 시급하게 손봐야 할 자들이 많았다(신군부 자체가 첫손에 꼽혀야 할 터).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이들을 증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캠페인은 그래서 일종의 사회적 환각 현상을 일으킴으로써 더 짙은 그늘을 가리려는 수작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경찰이 주도하는 이른바 ‘주폭(주취폭력)과의 전쟁’을 지켜보노라니, 대개 노숙인이나 실업자인 대상자들을 저인망식으로 잡아들이다 보면 치료와 지원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까지 ‘처리’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든다. 또 김황식 국무총리까지 가세해 ‘20-50 클럽’에 진입한 나라답게 “불건전한 음주문화”를 바로잡겠다고 했다는데, 그러자면 알코올중독에 대한 체계적인 치유 시스템부터 갖추고 외국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룸살롱·성매매 문화부터 고치는 게 순서가 아닐까. 고급술집·성매매업소와 경찰의 유착 의혹이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박용현 사회부장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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