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1969년 소련의 중국 포위망이 점점 옥죄어오자, 마오쩌둥은 문화혁명 때 숙청했던 인민해방군 장군 예젠잉(섭검영)을 불러들여 대외 전략을 다시 짜도록 지시한다. 예젠잉은 당시 금서로 묶여 있던 <삼국지>의 먼지를 털어내고 제갈량의 지혜를 빌려온다. “동쪽의 오와 동맹을 맺어 북쪽의 위에 대항한다.” 실제로 3년 뒤 마오쩌둥은 동쪽의 ‘제국주의자’ 닉슨과 손을 잡고, 북쪽의 ‘혁명 동지’ 브레즈네프에 맞선다.(키신저 <중국 이야기>) 한꺼번에 두 강대국을 대적하기 버거워서였을까. 20여년 뒤 소련은 붕괴하고 만다. 제갈량이 못 해낸 일을 마오쩌둥은 해낸 것이다.
이번에는 거꾸로다. 미국이 중국을 한바퀴 빙 둘러쌌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육상 14개, 해상 5개, 합쳐서 19개 나라 대부분이 중국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중국은 애초 주변국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 그 이름이다. 그런데 이제는 동서남북 모두 미국 오랑캐다. 하은주 이래 중국 역사에서 이렇게까지 고립된 적은 청나라 말기 때가 유일할 것이다.
중국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수모를 견디느냐, 아니면 천하 재편에 나서느냐.
참는 건 이미 20여년 전 제시된 길이다. 덩샤오핑은 1989년 “향후 50년 안에 절대로 세계의 영도자로 나서지 말라”고 이르며,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강조했다. ‘칼날을 칼집에 감추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뜻의 이 말은 삼국지의 유비가 조조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조조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쓴 처세술이다. 덩샤오핑의 충직한 제자라면 2040년까지는 엎드려 지내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인내심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 후진타오는 부국강병을 천명했고, 댜오위다오(센카쿠) 등지에서 심심찮게 근육 자랑을 하고 있다. 사실 그만한 힘도 있다. 지금 중국의 국력은 냉전 때 소련이 차지했던 상대적 비중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세력이 커진 유비가 조조를 떠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추구한 것처럼, 중국도 미국, 유럽연합(EU)과 함께 천하를 셋으로 나누자고 덤빌 만하다. 이때의 중국의 핵심 파트너는 러시아와 유럽연합의 프랑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배기찬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이런 세력 구도는 2차 대전 직후 1950~60년대 냉전 구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보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또다시 충돌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고전적인 대결 구도가 형성될 때마다, 죽어나는 건 한반도였다는 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압록강변에 도달하자 명은 항왜원조를 내걸고 참전했고, 이어진 7년 전쟁의 참혹함은 고스란히 조선 백성의 것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또한 전형적인 해양 대 대륙의 싸움이었다. 특히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영국과 미국이 전비와 군함을 대는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승전 직후 오쿠마 수상은 일본이 앵글로색슨의 도움으로 발전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물론 두 전쟁 모두 한반도에서 피를 보고야 말았다. 청일전쟁 때는 충남의 아산, 성환에 이어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러일전쟁 때 일본은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압록강에서 전투를 벌였다. 6·25 전쟁 또한 남북대결보다는 맥아더와 펑더화이(팽덕회)의 전쟁으로 보는 게 세계사적 시각이다.
삼천리강산을 피로 적시며 배운 역사의 교훈이 이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한-일 군사정보협정을 맺으려는 등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했던 동북아 균형자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쪽의 눈치를 보면서 멀찌감치 떨어져야 고래 싸움에서 새우가 살아남는 법이다. 일곱번 싸워 일곱번 사로잡힌 맹획의 어리석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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